기독교의 신앙은 강요나 의무에 호소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호소하는 신앙이다.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격함으로 반응하는 신앙이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 크고 벅차서 감사와 충성과 사랑을 바침으로 응답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고 체험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 하나님께 반역한 자를 다시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호소하는 수단도 사랑이며, 범죄한 죄인의 마음을 회개시키는 수단도 사랑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정죄나 심판으로 인류의 구속 사업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구원의 진리를 갈구하는 자가 알아야 할 첫 번째의 지식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에 여러 가지 교리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주제만큼 중심이 되는 교리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모든 교리가 오직 이 한 가지 주제와 연결될 때만 능력으로 옷 입게 될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이 한 가지 위대한 중심 주제에 대하여 더욱 명확한 견해를 갖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것이다”(Ty Forrest Gibson, Even the Death of the Cross, p. 4).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체험한 사도 요한은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는지를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깊이 명상해 보도록 하자.
그러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1. 성부 하나님의 고통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자
창조주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신 전능자이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도 고통이라는 쓰라린 경험이 있을 수 있을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서 그토록 쓰라린 고통을 감내하실 필요가 있으셨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죄 지은 인류를 멸망하도록 버려두는 것이나, 저들을 위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게 내어주는 것은, 어느 편이든지 하늘의 하나님께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초기문집, p. 127).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의 문제로 말미암아 쓰라린 고통을 당하신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1) 성부 하나님께서 고통을 당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범죄한 인류를 영원히 멸망하도록 버려두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크나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것도 하나님께 있어서 참으로 크나큰 고통이었다. 이 두 가지의 기로에서 고민하시고 고통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우둔한 인간의 두뇌로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로 인하여 쓰라린 고통을 당하셨는가?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거룩함, 진실성, 사랑, 공의, 자비, 순결, 은혜 등의 도덕적 속성들이다. 이것들 중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은 공의와 사랑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영원히 사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은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공의의 속성은 법을 범한 자에게 언제나 그 대가(代價)로 형벌을 요구하는 정신이다. 반면에 사랑의 속성은 죄를 범한 자를 용서해 주고 구원하고자 하는 자비의 정신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은 죄를 범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죄의 대가로 영원한 사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구원해 주기를 열망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속성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그리스도를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음을 당하도록 내어주는 일이었다. 죄의 값으로 인간들이 당할 영원한 사망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가 충족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희생과 공로와 의를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도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일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성부 하나님은 고뇌하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성부 하나님께서 쓰리고 아픈 심적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 이 기로에서 성부 하나님의 선택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성부 하나님은 이 둘 중에 어느 편을 선택하셨는가? 두 개의 갈림 길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음을 당하도록 내어주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요 3:16)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속에 느꼈던 심적 고통이 어떠했을까를 헤아려 보았는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 전에 먼저 성부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심적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실물로 가르쳐주는 것이 아브라함의 시험이다. 나이 많아 낳은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아들이었다. 장차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너무나 귀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었다. 그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헤아려 보자. 그처럼 귀하고 소중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손수 자신의 손으로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고통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뇌와 고통 중에 신음하는 아브라함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동시에 복음의 실재를 그의 마음에 새겨 주기 위함이었다. 그 무서운 시련의 어두운 날 동안 그가 참은 고통은 그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치르신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허락된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p. 154).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추어 아버지 하나님의 심적 고통을 헤아려보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하고 귀한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시기로 선택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지 않는가? 아버지 하나님에게 이 보다 더 큰 고통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대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치르신 고통과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고뇌와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얼마나 헤아리고 있는가? 이 엄청난 하나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어찌 우리 입술에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얼마나 황송하고, 감사하며, 감격스러운 일인가!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부 하나님의 고통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필자는 가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이 죄악의 소굴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을 다 쓸어버리고 새롭게 인간을 재창조하여 지구를 순식간에 새롭게 할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귀한 독생자의 죽음까지 희생할 필요가 있으셨을까”라고. 이 지점까지 생각하다가 문뜩 떠오른 사상은 하나님은 인류의 재창조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구속과 회복의 길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죄로 병든 인간의 심령을 구속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외치게 되었다.
육천년 동안 오랜 시간 속에서 죄로 찌든 인간들의 심령을 구속하시는 사랑으로 치유하시며 회복시키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명상해 보라. 이 구속의 역사는 온 우주의 거민들과 타락한 지구성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요일 4:8, 16)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놀라운 사랑을 어떻게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다 묘사할 수 없는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도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라고 탄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시기로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실까하고 의심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쳐다보아야 한다. 갈바리의 십자가가 누구를 위해 세워졌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3) 성부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셨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여기에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을 깊이 음미해보자.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처럼 가장 귀하고 소중한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음에 내어주셨는데 더 이상 우리에게 선물로 주지 못할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무엇이든지 선물로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강력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으로 이 세상의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신다. 그는 당신의 아들을 주심으로 온 하늘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다”(정로의 계단, p. 21).
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인가! 값없이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모든 것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가장 기뻐하시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일까? 죄의 용서, 심령의 정결, 마음의 평화, 칭의의 선물, 거듭남의 경험, 성화의 열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구원의 보증, 영생의 선물 등이다. 이것들처럼 귀한 선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들이야말로 제한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귀한 선물들을 무엇과 비교하겠는가?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이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죽음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감동적이며 감격스러운 것인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만날 때 어찌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바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먼저 보여주심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의 고통 속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하도록 하자. 그때 우리도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과 충성으로 반응하는 신앙이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또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2. 그리스도의 결심 속에 나타난 성자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자
우리가 깊이 명상해야 할 귀한 소재 중의 하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결심의 본질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결단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결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억누를 수 없는 결심, 즉 자기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꼭 인간을 구원하고야 말겠다는 그 결심의 엄숙한 지점을 향하여 비틀거리며 마침내 도달했을 때 그분께서 가졌던 생각과 감정, 그의 심령의 내적 투쟁이 어떠했을까를 헤아리기 위해 사람들은 그분의 심정 속으로 거의 들어가 보지 않는다. 이 거룩한 선택에 비추어 이해되어질 때에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광대한 우주 안에서 가장 힘 있게 강권하는 동기부여의 원동력이 된다” (Ty Forrest Gibson, Even the Death of the Cross, 서문).
(1)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결심은 어느 지점까지 자아를 굴복시키는 것이었는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빌립보서 2장 5-8절에 나타난 바울의 특별한 사상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시대의 소망, p. 693)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결심하신 마음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 주님의 전 생애를 지배했던 그러한 마음에서 나타난 최종적인 결심의 단계요 최후의 행위였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우주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자아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대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멀리 내려오셨는지를 깊이 명상해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①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RSV 영문 성경에는 “하나님의 본체”는 “the form of God”으로,
그리고 “사람의 모양”은 “human form”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처럼 “본체”와 “모양”이 똑같이 “form”이라는 단어로 쓰여 있지만, 헬라어 원문 성경에는 엄연히 다르게 쓰여 있다. 즉 “하나님의 본체”에 쓰여진 form은 헬라어로 “모르페(μορφη)”로 되어 있고, “사람의 모양”에 쓰여진 form은 “스케마(σχημα)”로 되어 있다. 그러면 “모르페”와 “스케마”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모르페”는 「그 변할 수 없는 본질적 형체」를 의미하고, “스케마”는 「본체를 그대로 둔 채 외형적으로 변화된 모양」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다」는 뜻은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본질과 도덕적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처럼 여김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신성에 속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②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러면 여기서 동등됨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등됨이란 말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위치를 명백하게 입증해주고 있다. 성자는 어떤 면으로도 열등하지 않은 동등한 신분에서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존재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관심 속에 그 위치를 포기하신 그리스도의 자발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이러한 위치를 진술하고 있다”(SDA Bible Commentary, vol. 7, pp. 154, 155).
그러므로 동등됨이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을 의미하며,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상태에서 계속해서 하늘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발적인 희생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곁에 머물러 계실 수도 있었다. 그는 또한 하늘의 영광과 천사들의 숭배를 그대로 받아 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쳐주시고 멸망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왕위를 아버지께로 바치시고 우주의 보좌에서 내려오시기를 선택하셨다”(시대의 소망, pp. 22, 23).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속 머무셨다면 우리의 운명은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될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버지의 곁을 떠나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으며, 숭고한 결심이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극치의 사랑과 희생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결심 속에 나타난 사랑과 희생을 우리는 얼마나 명상하며 감사하고 있는가?
③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비워지게 하셨다
여기서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본체를 비워두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신성 자체를 포기했다는 뜻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는 신성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신성과 인성이 신비스럽게도 결합되었으며,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셨다. 우리가 타락한 인류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결합에 있는 것이다”(Signs of the Times, 1896. 7. 30).
그러면 여기에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J. B. 라이트푸트(Lightfoo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가 버린 것은 신성의 영광과 대권이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종의 형체를 취함으로 이렇게 했던 것이다”(빌립보에 보내는 성 바울의 편지, p. 110).
네이단 스트롱(Nathan Strong)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의 독자적인 활용을 포기하는 데에 있다.--그리스도는 신-인(God-Man)으로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이후 인성에 있는 한, 신성의 능력의 활용을 계속 포기해 왔다는 데에 그의 비하가 있다.”
이 두 성경학자들의 진술을 종합해볼 때 “자기를 비웠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있는 동안 신성의 영광을 포기하셨다는 뜻이다.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신성의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의 영광중에 천사들과 온 우주의 거민들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아 오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하늘의 영광, 신성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둘째로, 인성에 있는 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성의 능력의 사용을 포기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그 어떤 능력도 사용하지 않으셨다”(SDA Bible Commentary, vol. 7, p. 156).
다른 사람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능력을 활용하셨지만, 자신의 문제에 관한한 결코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승리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신성의 영광과 능력을 포기하시고 송두리째 자신을 비우신 것이다.
④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여기에 “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둘로스 (δουλος)”인데, 이것은 “고용된 종(servant)”이 아니라 “노예가 된 종(slave)”이란 뜻이다. 고용된 종은 노임을 받고 일하는 종으로서 자기 수고의 대가를 받고 노동하기 때문에 그만두고 나갈 수 있는 자유와 선택권이 있다. 그러나 노예로 된 종은 완전히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며 본인에게는 아무런 자유나 선택권이 없다.
“그와 같이 사도(바울)는 그리스도께서 노예로 된 종(slave)의 본질적인 속성을 취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순종을 바치는 것이 종의 탁월한 순종인 것처럼 인간으로서 인자(예수님)도 아버지께 순종하셨다”(상게서, p. 155).
그리스도께서 전적 순종을 바치는 종의 입장에 서신 것은 인간 노예처럼 마지못해 억지로 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자원하심으로 선택하고 결심하신 것이다. 노예로 된 종의 입장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기로 선택하시고 결심하신 그리스도의 겸비 앞에 인간의 자랑은 무언의 견책을 받을 뿐이다.
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외모를 취하셨는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육신의 모양은 별로 볼품이 없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었다.
“영광의 왕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인성을 취하셨다.--그의 영광이 가리어졌던 것은 그의 외양의 위엄이 주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모든 외적 장식을 피하셨다. 재물, 세상의 명예, 인간적인 위대함은 결코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 어떤 세속적인 매혹물로 사람들을 당신의 편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직 하늘의 진리의 아름다움만이 그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을 이끌어야 하였다”(시대의 소망, p. 43).
그분께서는 외모의 위엄이나 외적 과시를 버리셨다. 우리는 여기서 내면생활의 가치와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적인 위대함으로 거들대는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는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인가! 오늘의 기독교가 참으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는가? 낡고 거칠은 십자가를 노래하지만, 금으로 장식된 십자가를 더 사랑하는 종교로 변질되어 버리지는 않았는지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자랑과 외적 과시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신 그리스도의 겸비 앞에 무언의 견책을 받을 뿐이다.
⑥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하늘 보좌에서 시작하여 어느 지점까지 멀리 내려 오셨는지를 숙고해 보자. 끝내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전적으로 아버지께 복종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그 자발적인 굴욕의 행위는 성육신으로 끝마치신 것이 아니라 치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계속되었다”(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p. 1325).
“예수님의 복종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바쳐진 것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굴욕이었다. 게다가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굴욕이었다. 이삭이 번제단 위에 놓여져야 할 희생제물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그의 아버지에게 기꺼이 복종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서 되돌아 갈 수도 있었으나 범죄한 인간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에까지 복종하셨다”(SDA Bible Commentary, vol. 7, pp. 155, 156).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몹시 미워하시며 박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이다.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한다 할지라도 인간을 꼭 구원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신 것이다. 말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오직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결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일생을 보내신 것이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거룩한 결심인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결심이 없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영원히 멸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놀라운 사랑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을 가장 불쾌하게 한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세상의 죄가 그분 위에 놓여 있었다. 그분은 사람을 대신하여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범한 자로서 고난을 당하고 계셨다”(증언보감, 1권, p. 222).
“하늘에는 침묵이 흘렀다. 거문고는 모두 멈췄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당신의 빛과 사랑과 영광을 거두시는 아버지를 침묵과 슬픔 가운데 지켜보았던 수많은 천사들의 놀라움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불쾌한지를 좀 더 잘 깨달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p. 693).
“세상의 죄가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에게 절실히 느껴졌다. 죄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불쾌와 그 형벌, 즉 죽음이 이 놀라운 흑암을 통하여 그분이 인식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죄가 하늘 아버지의 목전에 너무 가증하므로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과 화해할 수 없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유혹을 그분은 받으셨다” (증언보감, 1권, p. 229).
지금 그리스도는 순결하고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흉악한 죄인의 신분으로 서신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의 죄가 그분 위에 전가되었으므로 이제 그는 하나님 앞에 가장 가증스러운 죄인의 신분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리스도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증스러운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불쾌하게 한 요인은 바로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죄 때문이었다. 지금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형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토록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는가? 하나님의 성품, 즉 도덕적 속성들은 죄와 배치되는 속성들이기 때문에 죄를 결코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가장 미워하신다.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요구하리만큼 죄는 결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점을 깊이 깨달을 때에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하늘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죄를 버려야한다는 당위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3)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가장 큰 고통의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결심의 엄숙한 지점을 향하여 비틀거리며 나아가시는 그리스도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래서 그의 심령을 가장 쓰리고 아프게 한 고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깊이 명상해보도록 하자.
“인간의 죄를 짐에 따라 아버지께로부터 분리됨을 느낄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당한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대하여 우리는 희미한 개념밖에 가질 수 없다. 그분은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죄가 되셨다”(상게서, p. 225).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붙드시는 임재의 빛을 차단당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분은 범죄자들과 같이 헤아림을 받으셨다. 타락한 인류의 죄짐을 당신이 지셔야만 하였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분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지셔야만 하였다. 죄는 그분에게 매우 무섭게 보였으며, 그분이 지셔야할 죄악의 무게는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분은 이것이 당신을 아버지의 사랑에서 영원히 쫓아내지는 않을까 염려하도록 유혹받았다.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달으시고 예수께서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부르짖으셨다”(시대의 소망, p. 685).
“그분은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심연은 매우 넓고 매우 검고 매우 깊었으므로 그분의 심령은 그 앞에 떨고 있었다. 이 고민을 피하기 위하여 그분은 그의 신성의 능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인간의 죄악의 결과를 감당해야만 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어야 하였다”(상게서, p. 686).
“사람들의 죄악이 그리스도를 무겁게 억눌렸으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식함으로 그분의 생명은 파쇄되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을 위해 지불할 값을 깊이 생각하시는 예수님을 보라. 고통 중에 마치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더 멀리 떨어지지 않으시려는 것처럼 차디찬 땅바닥에 엎드리셨다”(상게서, p. 687).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가장 큰 고통의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첫째는 그분이 지셔야할 온 인류의 무거운 죄로 인한 강렬한 죄책감이었으며, 둘째는 자신이 짊어지신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분리되고 버림받는 강렬한 느낌이었다. 이것처럼 가장 쓰디 쓴 잔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분께서 마셔야 할 십자가의 잔이 얼마나 쓰디 쓴 것이었으면 이렇게 부르짖으셨을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NIV). 지금 그리스도는 신성으로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인성을 입으신 인간으로서 가장 쓰디 쓴 십자가의 잔을 마셔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 십자가의 잔은 너무나 쓴 것이었기에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마시지 않고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르짖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맡기셨다.
그처럼 무겁고 강렬한 죄책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와 단절을 느낄 때에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정신적인 고통을 무딘 인간의 감성으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처럼 쓰디 쓴 심적 고통을 누구를 위해 견디셨는가? 바로 그대와 나를 위해서이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다!
(4) 그리스도의 결심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사단은 얼마나 맹렬하게 유혹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의 연합이 깨어지신 것을 느끼셨을 때에 그의 인성으로 다가오는 흑암의 세력과의 투쟁을 견딜 수 있을까 두려워하셨다. 광야의 시험에서 인류의 운명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그리스도는 승리자가 되셨다. 이제 유혹자는 무서운 최후의 투쟁을 위하여 나왔다. 이 일을 위하여 유혹자는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시는 삼년 동안을 준비해 왔었다. 사단은 이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만일 그가 여기서 실패하면 패권을 잡으려던 그의 희망은 좌절될 것이며 세계는 마침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고 그 자신도 실패하고 내어 쫓길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실패하신다면 지구는 사단의 왕국이 될 것이며 인류는 영원히 그의 권세 아래 있게 될 것이었다. 당신 앞에 놓인 투쟁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사단은 그리스도에게, 만일 그가 죄악이 가득 찬 이 세상을 위하여 보증인이 된다면 하나님과는 영원히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분은 사단의 왕국에 동화될 것이며 다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희생으로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죄 많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였는가!--그분이 구원하고자 했던 자들, 그분이 그렇게 극진히 사랑하신 자들이 사단의 음모에 연결되리라는 사실은 그분의 마음을 찔렀다. 투쟁은 무서웠다.--죄의 악함이 얼마나 어둡게 보였던가! 인류로 범죄의 결과를 당하게 하고 당신 자신은 하나님 앞에 결백한 사람으로 서라는 유혹은 무서운 것이었다”(상게서, pp. 686, 687)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결심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사단이 얼마나 맹렬하게 유혹하고 있는지를 주시하면서 사단의 유혹의 논조를 분석해 보자. 첫째로,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것이라고 유혹하고 있다. 둘째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가치가 무엇인가라고 유혹하고 있다. 셋째로, 무엇보다 범죄의 결과는 범죄한 인간이 당하게 하고 당신 자신은 하나님 앞에 결백한 자로 서라고 유혹하고 있다. 얼마나 그럴듯한 논조인가! 얼마나 무서운 투쟁의 순간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대와 나를 위해 어떠한 결심을 하셨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5) 가장 큰 고통과 사단의 맹렬한 유혹을 받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결심을 하셨는가?
“두려운 순간, 세계의 운명이 결정되려고 하는 순간이 이르렀다. 온 인류의 운명이 저울 위에서 떨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이라도 범죄한 인류가 마셔야 할 잔을 거절하실 수도 있으셨다. 지금도 이 일은 너무 늦지 않았다. 그분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씻어버리고 죄 가운데 인류가 멸망하도록 버려두고 떠나가실 수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범죄자로 하여금 그의 죄의 형벌을 받게 하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멸시와 고통의 쓴 잔을 마실 것인가? 무죄한 그분이 죄인을 구워하기 위하여 죄의 저주의 결과를 맛볼 것인가?--그러나 이제 인류의 역사가 구주 앞에 펼쳐진다. 그분은 율법을 범한 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신다면 틀림없이 멸망당할 것을 보신다. 그분은 인류의 무력함을 보신다. 그분은 죄의 세력을 보신다. 운명지워진 세계의 재난과 비탄이 그리스도 앞에 떠오른다. 예수께서는 세계의 절박한 운명을 바라보시며 결심하신다. 그분은 자신에게 어떤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인간을 꼭 구원하실 것이다. 멸망하는 무수한 인간이 그분을 통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그분은 피의 침례를 받아들이신다”(상게서, pp. 690-693).
이 얼마나 숭고한 결심인가! 이 얼마나 숨 막히는 순간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지 않고 하늘로 되돌아가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기로 결심하셨다. 어떠한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인간을 꼭 구원하리라는 그리스도의 결심이 없었더라면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숭고한 결심 속에 나타난 성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 어찌 감동함이 없이 그리스도의 결심 속에 나타난 성자 하나님의 사랑을 지나쳐 버릴 수가 있겠는가?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감격스럽지 않는가? 이러한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간절한 열망이며, 소원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기로 결심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와 감사를 영원토록 돌리자.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또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3.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자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갈바리의 십자가이다. 때때로 자신의 연약함과 범죄로 인하여 절망하고 좌절할 때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며 용납해 주실까 하고 의심의 안개 속에 방황할 때가 있는가? 이제 자신에게로 향한 눈을 돌이켜 갈바리의 십자가로 눈을 고정시켜 보라. 그곳에 무엇이 보이는가? 십자가상에 높이 달리신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가? 믿음의 눈으로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자.
(1)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고통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면 십자가의 형벌은 어떠한 형벌이었는가?
① 십자가는 악질 죄수에게 주어지는 형벌이다
“십자가에 못을 박는 형벌은 하나의 독특한 로마인의 사형집행 방법이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결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으며 이러한 형벌은 노예나 악질 범죄자나 비로마인과 같은 전적으로 멸시당한 사람에게 처형되었다”(SDA Bible Dictionary, p. 236).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가 악질 범죄자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신 것이다. 이제 그는 가장 악질의 범죄자로 하나님 앞에 취급을 받으신 것이다. 죄인 중의 가장 사악한 괴수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죄와 상관이 없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사악한 죄인의 입장에 서신 것이다. 누구를 위해 이처럼 죄인 중의 괴수로 취급을 당하셨는가? 그대와 나를 위한 것이다.
②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다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손에 못이 박혀있고 발목에도 못으로 박혀 있었다. 온 몸에서 피와 물이 다 빠진 후에야 죽기 때문에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형벌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은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 최후 발악을 하며 소리를 지르게 된다. 또한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하고 밤낮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체 최악의 고통을 느끼면서 죽게 된다. 이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이다.
③ 십자가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이다
“십자가는 죄수들과 저주 받은 자들에게 마련된 것이므로 십자가는 또한 예수께서 당하신 고통과 수치와 모욕을 상징하였다”(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vol. 1, p. 1038).
“일반적으로 선고받은 사형수는 자신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까지 짊어지고 가도록 강요되었다”(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1, p. 745).
십자가는 인간이 당하는 최대의 수치와 모욕의 형벌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그대와 나를 위해 가장 치욕적인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신 것이다.
④ 십자가는 가장 잔인스러운 형벌이다
“그 강조점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일종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강렬한 고통은 물론 강렬한 수치를 수반한 죽음이었다. 십자가 형벌은 비로마인 노예들과 가장 비열한 죄수들에게 주어지는 형벌이었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 하나의 저주로 선언된 죽음(신 21:23; 갈 3:13)이었으며, 심지어 이방인들까지도 모든 형벌 중에서 가장 무참하고 잔인한 것으로 여긴 형벌이었다”(SDA Bible Commentary, vol. 7, p. 156).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잔인스러운 형벌을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하여 그토록 잔인스러운 형벌을 받으셨는가? 그대와 나를 위해서이다.
⑤ 십자가는 죽음을 요구하는 형벌이다
“어디에선가 시작된 이 십자가의 형벌은 알렉산더 대제가 페르시아인들에게서 배운 것 같이 보인다. 로마는 이 형벌을 칼타고 전쟁을 통하여 페니키아인들에게서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하나의 사형수단으로서 완벽한 것이었다”(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vol. 1, p. 1038).
십자가에 매달린 자는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이 형벌은 완벽한 죽음을 요구하는 형벌이었다.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대와 나를 위하여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그대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다 감내하시고 끝내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이 얼마나 황송하며 감격스러운 사랑이 아닐까! 눈물겹도록 고마운 사랑이 아닌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다.
(2)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정신적인 고통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고통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고통과 그의 몸에 가해진 잔인한 고문은, 우리가 그분의 고난을 명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재들이다. 그 어느 인간도 그분이 당하신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정신적인 고뇌와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한다면 훨씬 더 감탄할 수밖에 없는 명상의 소재인 것이다. 그 커다란 육체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령의 고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인간의 마음이 그토록 감동되지 않을 수 있을까”(Ty Forrest Gibson, Even the Death of the Cross, p. 11).
그러면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가장 큰 정신적인 고통의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① 가장 사악한 죄인으로서 느끼는 강렬한 죄책감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그분의 잔이 그렇게 쓰게 된 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불쾌히 여기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렇게 신속히 끊어진 것은 육체적 고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짓누르는 세상 죄악의 무게와 하늘 아버지의 진노 때문이었다”(증언보감, 1권, p. 228).
“그분이 마신 잔을 그처럼 쓰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은 인류의 대속자인 그분에게 아버지의 진노가 쏟아지게 만든 죄에 대한 의식이었다”(시대의 소망, p. 753).
죄책감처럼 심령에 고통을 안겨주는 감정은 없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책감에 사로잡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두려워 숲속에 숨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대와 내가 겪어야할 강렬한 죄책감을 느끼고 계셨다. 지금 그리스도에게 놓여진 죄는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창세시대로부터 세상 종말까지 이 땅에 존재하게 될 온 인류의 죄의 짐이었다. 그 무거운 죄의 짐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범한 죄의 짐으로 취급되었으며, 무겁게 그의 양심을 괴롭히고 있었다. 양심의 강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적인 고통은 너무나 컸으므로 육체적인 고통을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 얼마나 큰 정신적인 고통이었는가! 누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는가? 그대와 나를 위해서이다.
② 죄가 얼마나 흉악하며 무서운 것인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실 때 느끼는 고통이었다
“이제 영광의 주께서는 인류를 위한 대속물로서 운명하고 계셨다. 그분의 귀중한 생명을 거두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기쁨으로 들뜨지 않으셨다. 모든 것은 숨이 막힐 듯이 침울했다. 그분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분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자아내게 한 것은 십자가의 고통과 치욕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당하는 자 중에 제 일인자이셨으나 그분의 고통은 죄의 유해성을 느끼는 데서 오는 고통, 인간이 죄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죄의 흉악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는 데서 오는 고통이었다.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너무나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과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나오려는 사람은 너무도 적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아셨다”(상게서, pp. 752, 753).
인간이 너무나 죄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해로운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인간의 영적 무지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심적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그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는 것은 바로 죄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죄에 대한 인간의 무지함을 보실 때 그분의 마음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죄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③ 자신이 짊어진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느끼는 데서 오는 고통이었다
“우리의 대리자요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 모두의 죄가 놓여졌다.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분은 범죄자로 헤아림을 받으셨다. 아담의 모든 자손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불법으로 인하여 생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 곧 그분의 무서운 진노가 당신의 아들의 영혼을 전율하게 만들었다”(상게서, p. 753).
가장 사악한 죄인이 되신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몹시 불쾌히 여기실 뿐 아니라 죄에 대하여 진노하고 있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셨을 때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심령은 떨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④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분리되는 강렬한 느낌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지신 죄의 엄청난 무게로 인하여 그분은 화해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 최대의 고민의 시간에 구주께로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심으로 인하여 인간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분의 마음을 찔렀다. 이러한 고민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분은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히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상게서, p. 753).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언제나 인자하신 아버지의 임재 속에 살아 오셨다. 그러나 가장 극도의 고민의 시간에 하늘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들의 죄를 불쾌히 여기시는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가리우신 것이다. 그 순간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분리되는 강렬한 느낌을 받으신 것이다. 다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유혹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고통과 고민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고통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죄의 무거운 짐과, 죄의 무서운 흉악과,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느낌이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케 하였다”(정로의 계단, p. 13).
이 얼마나 무서운 정신적인 고민과 고통이었는가! 이 엄청난 고뇌와 고통을 누구 때문에 당하신 것인가? 그대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무서운 고통을 끝까지 감내하신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감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⑤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버림받는 강렬한 느낌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자신이 짊어진 온 인류의 무거운 죄 때문에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받는 강렬한 느낌은 마침내 그의 입술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비탄의 소리를 흘러나오게 했던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부르짖음인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것처럼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에게 큰 고통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분의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울부짖었을까?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버림을 당하는 강한 느낌으로 그리스도는 최고조의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얼마나 쓰디 쓴 고통인가!
이 엄청난 고뇌와 고통을 누구 때문에 당하신 것인가? 그대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무서운 고통을 끝까지 감내하신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감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바로 여기에 그대와 나를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저리게 하고,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지 않는가? 기쁨으로 들뜨기보다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앞서고, 한 없이 죄송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눈물 없이 이 고통스러운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도 우리의 감정은 죄로 무디어 버린 것일까? 생명 없는 무생물도 하나님의 아들의 고통을 동정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왜 그토록 냉랭하고 무정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은 이 문제의 해답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성부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큰 희생을 한 것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속에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일으키거나 또는 아버지로 하여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원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그 큰 속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속죄를 준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사랑을 세상에 부어 주시는 일에 매개자가 되시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정로의 계단, p. 13).
이 영감적인 진술 속에서 우리의 의문점은 완전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의 근원이 바로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된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로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그리스도는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일에 매개자가 되신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바로 구속하시는 사랑의 근원은 성부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치 죄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주도적으로 속죄물이 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잘못된 개념은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들이 되신 그리스도의 고통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고통이 함께 나타나 있으며, 그 고통 속에는 우리를 위한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나타나 있는 것이다.
(3)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사단은 얼마나 맹렬하게 유혹하였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맹렬하게 유혹하던 사단과 그의 부하들은 갈바리 십자가 주변으로 총동원되었다. 이 기회야말로 사단에게 최후의 투쟁의 기회였다. 사단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기회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유혹해야만 하였다. 사단은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포기하도록 맹렬하게 유혹하기 시작했다. 다음의 영감의 말씀은 사단의 유혹이 얼마나 맹렬한 것이었음을 잘 묘사하고 있다.
“사단은 맹렬한 유혹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쥐어짜듯이 괴롭혔다” (시대의 소망, p. 753).
“사단과 그의 천사들은 인간의 모양으로 십자가 곁에 나타났다. 사단과 그의 군대들은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더불어 협력하고 있었다.--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바리새인들과 완악한 폭도들은 미친 듯이 사단의 무리와 결탁했으며 종교지도자들도 사단과 그의 천사들로 더불어 연합하였다. 그들은 그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상게서, pp. 746, 749).
① 사단은 군중들을 충동하여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포기하도록 강렬하게 유혹하였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 42).
사단은 광야에서 똑같은 어조로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하였다. 사단의 논조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사단은 군중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충동하여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포기하도록 강렬하게 유혹하였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은 그분께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상게서, p. 749).
②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것이라고 사단은 강렬하게 유혹하였다
사단의 논조를 주의 깊게 분석해 보자.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만일에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는 다시 연합할 수가 없고, 영원히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논조였다. 사단의 논조가 얼마나 그럴듯한 것인가? 사실상 지금 그리스도는 자기가 짊어진 죄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분리되었다고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그리스도의 약점을 이용하여 사단은 강렬하게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심연은 매우 넓고 매우 검고 매우 깊었으므로 그분의 심령은 그 앞에 떨고 있었다. 이 고민을 피하기 위하여 그분은 그의 신성의 능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인간의 죄악의 결과를 감당해야만 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어야 하였다”(시대의 소망, p. 686).
참으로 혹독한 유혹이었다.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분리되고,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유혹처럼 고통스럽고 강렬한 유혹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얼마나 고뇌와 고통을 안겨주는 유혹인가? 그리스도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분의 고유의 신성의 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범죄의 결과를 감당해야만 했던 그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깊이 명상해 보자. 그러나 그분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고 선택하지 않으시고 그대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끝까지 받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성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찬송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단의 최후의 유혹은 너무나 맹렬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쥐어짜듯이 괴롭히고 있었다. 너무나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아무런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절박한 절망의 상황이었다.
(4) 절박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는 무엇으로 승리하셨는가?
①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의 희생이 가납되었다는 아무런 보증을 받지 못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구주께서는 무덤의 문을 꿰뚫어 보실 수 없었다. 그분이 정복자로서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희망이 주어지지 않았고, 아버지께서 자기의 희생을 가납하셨다는 말도 그분에게 들려오지 않았다”(상게서, p. 753).
참으로 절박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아버지께로부터 아무런 희망적인 보증을 받지 못한 채 사단의 맹렬한 유혹을 직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깊이 명상해 보라. 아버지께로부터 자기의 희생을 가납하셨다는 보증이 주어졌다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불신과 의심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기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리스도는 승리하셨다. 여기에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러면 그는 무엇으로 승리하셨는가?
② 그리스도는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셨다
“표면상으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무서운 암흑 중에서 인간이 마셔야 할 고통의 잔을 남김없이 마셨다. 이 무서운 시간 동안 그분은 이제까지 그분에게 주셨던 아버지의 가납하심의 증거에 의지하였다. 그분은 아버지의 품성을 잘 알고 계셨으며 그분의 공의와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이해하고 계셨다. 그분은 자기가 즐겨 순종하던 그분을 믿음으로 의지하셨다. 그분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에 아버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은 없어졌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자가 되셨다” (시대의 소망, p. 756).
마침내 그리스도는 오직 믿음으로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아버지의 공의와 사랑과 자비의 품성이 어떠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아버지를 믿음으로 의지하셨던 것이다. 끝까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에 모든 의혹은 사라지고 믿음으로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의 승리의 모본이 되신다.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여 구원받을 자들에게 똑같은 경험이 반복될 것이다. 야곱의 환란의 때에 남은 무리에게 사단이 맹렬하게 시험하고 유혹할 때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방법, 오직 믿음으로만 승리하게 될 것이다. 사단이 우리의 죄를 상기시키면서 좌절시킬 때,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의 씻음과 용서함을 받았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함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남은 무리는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패배자로서가 아니라 승리자로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셨다. 그리고 믿음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부르짖으신 다음 조용히 운명하셨다.
(5) 갈바리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해주고 있는가?
① 십자가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실까”하고 종종 의심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은 여기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갈바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증거가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갈바리의 십자가이다. 갈바리의 십자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리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저 십자가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세워졌는지를 늘 생각해야 한다.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측량할 수 없는 자비에 대한 영구적인 서약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p. 156, 385).
저 하늘에 세워진 언약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마다 다시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서약임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참으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표와 보증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찾아야 한다. 저 갈바리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강력한 증표요 보증인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찾아올 때마다 그대 자신을 보지 말고, 갈바리의 십자가를 쳐다보라.
갈바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리자.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시기까지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리자.
②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흉악하고 무서운 것임을 증거한다
갈바리의 십자가는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우리의 죄의 대가로 하나님의 아들의 피와 죽음이 지불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죄가 얼마나 흉악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요구하리만큼 죄는 흉악하고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렌즈를 통해서만 죄의 흉악함을 깨달아 알 수 있다.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그는 영광의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산상보훈, p. 9).
“우리가 죄의 흉악함을 가장 절실히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분히 이해하는 그 때이다”(정로의 계단, p. 36).
“갈바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를 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놀라운 희생의 기념물로 서있다. 우리는 죄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말자”(상게서, p. 33).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죄의 흉악함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며 죄를 미워하는 자가 될 것이다.
③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며 철저히 박멸하신다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며 철저히 박멸하신다는 사실이 십자가에서 실증되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하리만큼 강하다는 것이 온 우주 앞에 공개되었다. 하나님은 죄를 철저히 미워하신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는 결코 하나님과 공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지 않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가 심판으로 옮겨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와 죄인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셔야 한다. 이 선고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의 자리인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다. 이 속죄는 사람이 거룩한 분노 아래 섰기 때문에 필요했다.--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하나님의 공의를 합당하게 만족시켰고, 또 하나님은 인간이 죽는 것 대신에 그리스도의 자아희생을 기꺼이 받아 주신 것이다”(한스 K. 라론델,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장병호 역, p. 38).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며 철저히 박멸하신다는 사실은 이미 십자가의 예표인 성소봉사 제도를 통하여 인상 깊게 가르쳐 주셨다. 번제물의 전신(全身)과 여러 가지 제물의 부분들이 번제단에서 재가 될 때까지 완전히 소각되었으며(레 4:8-10, 19, 26, 31, 35), 회중을 위한 속죄제를 드릴 경우에 때로는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희생제물의 전신을 재가 될 때까지 완전히 불로 태웠다(레 4:11, 12, 20, 21). 이것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죄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박멸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청각 교재로 생생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 지구의 구속 사업이 완성되는 그날에 죄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들은 하늘의 유항불로 완전히 소각될 것이며, 그때에 죄의 역사는 종식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서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아야 한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 6:2)임을 깊이 명심하자.
④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증거한다
“갈바리의 십자가는 율법의 불변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죄의 값은 사망임을 온 우주에 선포하는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p. 50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증거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12).
“십자가에서 자비와 진리가 서로 만났으며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다. 죄인이 갈바리에서 죽어가는 구세주를 바라보고 고난당하시는 분이 거룩하신 분이심을 깨닫게 될 때에 그는 왜 이러한 큰 희생을 치루어야 했는지 묻게 된다. 그때에 십자가는 범한 바 된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불변성과 의에 대하여 결정적인 논증이 된다”(상게서, pp. 322, 323).
오늘날 수많은 개신교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율법은 폐지된 것이므로 성경상 제칠일 안식일도 일요일로 변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얼마나 모순된 논리인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인류의 시조와 그의 후손들의 죄의 대가로 그리스도의 희생이 지불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을 범한 자에게 내려진 영원한 사망의 선고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심으로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결코 변하거나 폐할 수 없는 율법의 불변성을 강력하게 입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 즉 십계명은 성문화된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다. 거룩함, 진실성, 순결성, 공의, 사랑, 자비, 은혜 등등의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이 십계명 즉 도덕적 율법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십계명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을 분석해 보면 바로 그 정신이 하나님의 성품임을 잘 알 수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이 변하거나 폐지된다면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즉 하나님의 성품도 변할 수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갈바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온 우주에 공포한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율법이 죄를 범한 자에게는 죄를 지적해 주고 정죄함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로 정결함을 입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성품의 열매로 맺혀지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 열매가 완숙되어질 때, 그것이 곧 성화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이 나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애 속에서 “율법의 완성”(롬 13:10)을 이룬 것이다.
⑤ 십자가는 회개하는 죄인에게 철저한 속죄를 제공한다는 것을 증거한다
“인간이 범하는 어떤 죄든지 갈바리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열렬한 호소로서 계속적으로 죄인에게 철저한 속죄를 제공하고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43).
인간이 스스로 거절하고 저항하지 않는 한, 인간이 범하는 그 어떤 죄도 갈바리 십자가에서 용서함을 받지 못할 죄는 아무 것도 없다고 열렬하게 호소하고 있다. 죄인에게 철저한 속죄를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지 않은가?
“영혼에게 찍힌 죄의 낙인은 오직 대속제물의 피를 통해서만 지워버릴 수 있다. 하늘 아버지와 동등하셨던 주님의 희생보다 덜한 제물로서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상게서, p. 371).
우리의 심령 속에 얼룩진 모든 죄들을 대속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도록 하자. 갈바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씻지 못할 죄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에 넉넉하고 충분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다.
⑥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겠다는 언약의 증표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갈바리 십자가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깊이 명상해 보라. 저 십자가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세워졌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라.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주시겠다는 언약의 증표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펴신 팔로 죄인들뿐만 아니라 탕자까지라도 언제나 받으시고 환영하신다. 주님의 죽기를 무릅쓴 사랑, 갈바리 산상에 나타내신 그 사랑은 용납과 평화와 사랑에 대한 죄인들의 보장이 되는 것이다”(상게서, pp. 178, 179).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 펴신 팔로 죄인들과 탕자들을 언제나 받으시고 환영하신다니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롭게 만드셔서,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경험은 한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우리의 생애 속에 계속되어야 할 경험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자.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날마다 깨닫고 체험하도록 하자.
성령의 이른비의 역사 아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체험하게 될 때 우리의 죄된 심령은 녹아지고 부드럽게 되어 그분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증거의 능력을 부여하시기 위하여 성령의 늦은비의 능력이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고로 늦은 비를 위한 근본적인 준비의 시발점은, 이른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함으로 그분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되는 것임을 깊이 명심하자. 바로 이러한 경험이 선행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부르짖는다 해도 그런 자에게 늦은비의 능력은 결코 임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십자가로 나아가자.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체험하도록 하자.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울려주고, 감동시키며, 녹여서, 그분의 형상으로 온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경험이 매일의 생활 속에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자. 이것이 우리 모두의 간절한 열망과 소원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고 체험하라”는 주제를 고찰해 왔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는가?
첫째로, 성부 하나님의 고통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자. 둘째로, 그리스도의 결심 속에 나타난 성자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자. 셋째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자.
우리 모두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하도록 하자. 바로 이것이 구원의 경험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과정이다. 신앙의 진정한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의무나 규범에 호소하는 신앙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체험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때 신앙생활은 고역이 아니라 즐겁고 자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