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묻는 질문은 “왜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지 않고 이렇게 오래 지체되고 있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는 이유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벧후 3:9)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대답해 보자. 10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더라면 그대는 유감없이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 5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더라면 그대의 영적 상태가 온전히 준비되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일에 1년 전이라면 어떠했을까?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지 않은 것은 우리 자신의 준비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15)는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가?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회개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초기 단계에만 필요한 과정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자신이 쓰러지고 넘어질 때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필요하듯 우리의 회개도 똑같이 수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우리의 귓전에 들려오는 음성은 더욱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음성이다.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는 회개를 하고 있는가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 죄를 품고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광채 앞에 결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조건 중의 하나는 곧 회개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회개에 대하여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
(1)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① 참된 회개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을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전적인 변화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정로의 계단, p. 23).
진정한 회개에는 자신의 범한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후회할 뿐 아니라 미워하는 경험을 수반하게 된다. 죄를 변명하거나 용인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시인하며 뉘우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죄를 슬퍼함이 없이는 죄를 미워할 수가 없다. “자신의 악한 길과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자신의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여기는” 심령이 수반되는 회개가 진정한 회개이다.
② 참된 회개란 죄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할찌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찌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겔 18:30).
“참된 회개란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악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돌아서는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p. 557).
마르틴 루터도, “회개는 죄를 슬퍼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회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죄를 슬퍼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죄를 따라 가는 길이 동쪽이었다면, 회개는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단순히 방향 전환만이 아니라 내가 붙잡았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마 3:8) 맺지 아니하면서도 자신은 회개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것을 회개로 착각한다. 아무리 회오의 눈물을 흘렸다 할지라도 그 죄에서 돌이켜 떠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하늘이 인정할 만한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시대의 소망, p. 555). 그러므로 결정적으로 회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은 자신의 범한 그 죄에서 확실하게 돌이켜 떠나는 것이다.
(2) 거짓된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많은 사람은 그들의 악행이 그들 자신에게 고통을 초래할까 두려워 자신이 범한 죄를 후회하고 겉으로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의 회개가 아니다. 그들은 죄 자체보다도 그 고통을 슬퍼하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p. 23).
발람은 칼을 빼어 들고 자기 앞길을 가로막은 천사를 보고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자기 죄를 자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죄를 미워하지도 않았으며 목적을 바꾸지도 않았다.
가룟 유다도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아 버린 후 부르짖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자백하였다. 그러나 이 고백은 자신이 받게 될 무서운 심판이 두려워서 공포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자백한 것이다. 무죄한 피를 판 자신에게 두려운 결과가 임하게 될 것을 깨닫고 자백한 것이다. 이것은 죄 자체를 슬퍼하거나 죄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굽의 바로 왕이 하나님의 형벌로 재앙들을 당할 때에 그 형벌을 더 이상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 죄를 자복하였으나 그 재앙이 그치자마자 다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이 모든 경우들은 다 죄의 결과가 두려워서 자백한 것뿐이요 죄 자체를 슬퍼한 것은 아니었다.
다윗이 범죄한 후에 드린 기도는 죄에 대하여 참으로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회개는 참되고 마음 속 깊은 데서 나온 것이었다. 죄를 변명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도 없었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가 얼마나 흉악하며 가증스러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죄로 자신의 심령이 더러워진 것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미워하였다. 그는 죄사함을 위해서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정결을 위해서 탄원하였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란 죄 자체를 슬퍼하고 미워함으로 자백하는 것이며, 죄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회개는 죄의 결과로 당하게 될 형벌이나 고통을 두려워하여 죄를 자백하는 것이며, 여전히 죄를 버리지 않고 품고 있는 상태이다.
(3) 왜 회개해야 하는가?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회개하기를 원하시는가? 회개의 당위성은 무엇인가? 이점을 성서적인 관점에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① 죄는 하나님의 성품과 배치되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중세 시대의 전도자들은 무서운 심판의 형벌에 기초하여 회개를 촉구하였다. 오늘날도 개신교의 부흥사라는 사람들은 여전히 동일한 기초에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불 속에서 영원히 타면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쉰 목소리를 높여 호통을 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회개시키시는가? 필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과연 이것이 성서적인 회개의 당위성인가? 이렇게 성경을 몽둥이로 삼고 위협하고 협박함으로 회개를 촉구했을 때 마음속으로부터 진정으로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솟구쳐 우러나올 수 있을까? 형벌이 두려워서 회개할지는 모르나 그런 방법으로는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수 있는 진정한 회개를 일으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상한 심령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그러면 왜 우리는 회개해야 하는가? 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전적으로 배치되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은 죄를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체질은 죄의 냄새를 결코 맡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가장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죄와 죄인은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공존할 수가 없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자는 회개함으로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죄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품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같은 성질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화된 성품인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하늘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죄를 버리지 않고는, 죄를 승리하지 않고는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죄를 버리지 아니하고 죄를 품은 채로 하늘에 간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천국이 가장 고통스러운 장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랑이 충만한 하늘의 분위기와 결코 조화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② 죄는 하나님의 마음에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죄로 인하여 우리의 창조주께서 받으시는 고통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사람이 옳은 데서 떠나는 때마다, 잔인한 행동을 할 때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상에 도달하지 못할 때마다 하나님께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다”(교육, p. 263).
죄의 진정한 성질에 대해서 너무나 피상적으로만 알기 때문에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죄가 무엇이며, 죄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그리스도께 어떻게 영항을 미쳤는지를 깊이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떨쳐버리도록 죄를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죄의 진정한 성질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의 표현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p. 493).
“시내 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사본이다”(우리의 높은 부르심, p. 138).
그러므로 죄란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과 충돌을 빚는 것이다. 죄란 단순히 차가운 두 돌비에 기록된 어떤 감각도 없는 법규를 깨뜨린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요 그분의 거룩한 정신과 사랑의 마음의 사본이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요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다. 모든 범죄행위, 모든 불순한 생각과 동기, 모든 참지 못하는 말과 격분한 눈초리, 이 모든 범죄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실제적으로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끼치는 죄의 두려운 본질과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갈바리 십자가에서 목격한 그 고통은 죄가 시작된 이래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해오신 고통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하여 죄를 범할 때 창조주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고통과 슬픔을 당하신다. 하나님의 심적 고통은 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그분의 마음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죄가 종식될 때까지 그 고통은 계속 될 것이다.
“「그를 찌른 자들도」라는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갈바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을 찌른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악한 말과 그릇된 행동으로 그분을 찌른 자들에게도 적용된다. 날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다. 날마다 남녀들은 그분을 욕되게 함으로, 그분의 뜻을 행하기를 거절함으로 그분을 찌르고 있다”(Signs of the Times, 1903. 1. 28).
이상의 진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그리스도의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종식된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가 않다.
우리의 생애 속에 죄를 간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며,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예수께서는 다시 상처를 입으신다.
“죄는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다시금 그분의 부드럽고 민감한 심령에 못을 박고 있다. 사랑받는 자에게서 거절당하거나 배반을 당한 인간의 깊은 상처가 실제적인 것처럼 사람들이 죄와 자아방종의 진로를 추구할 때 그리스도의 심적 고통은 실제적인 것이며 더욱 더 강렬한 것이다. 크든 작든 모든 죄와, 성실과 순결의 길에서 떠나가는 모든 행위는 그분의 거룩한 심령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바로 이점이 진저리를 내면서 죄에서 돌이켜야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가?”(Ty Forrest Gibson, Even the Death of the Cross, p. 50).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는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깊은 고통과 상처를 안겨준다. 우리의 창조주께서 고통을 당하시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우리가 범하는 죄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심령은 죄에 대한 깊은 슬픔으로 가득차게 되고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로 이끌어준다.
“모든 죄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다시 상처를 입으시며, 우리 때문에 찔림을 받으신 예수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께 고통을 안겨준 죄를 인하여 슬퍼하게 된다. 이러한 애통이 죄를 버리게 하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p. 300).
(4)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 동기부여는 무엇인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우리의 심령에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 동기부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회개를 일으키는 동기부여는 심판이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있으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그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실물교훈, p. 189).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먼저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진정한 회개를 일으키는 원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역할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우리 인간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심령 속에서 통회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영감의 말씀은 이 원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우리가 갈바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죄인이 이 사랑을 바라볼 때에 이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며,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정로의 계단, pp. 26, 27).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시면서 죄인을 이끄시고, 이 사랑은 마음을 녹이고, 생각을 사로잡아, 심령으로 통회와 회개하는 마음을 일으킨다”(Review and Herald, 1890. 4. 1).
“우리가 죄의 악한 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분히 이해하는 그때이다.--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그 무한한 희생을 얼마만큼 깨달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움과 통회로 녹아지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p. 36).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에 나타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사랑에 감동되어 감격할 뿐만 아니라 통회하는 심령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죄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까지 요구하셨는지를 깨닫게 될 때에,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마음이 솟구치게 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내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음의 영감이 말씀은 이 점을 적절하게 진술하고 있다.
“물론 회개가 용서의 선행조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 가납하심을 받는 유일한 조건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며,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수도 없고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 위하여 준비할 수도 없다. 죄인은 회개하지 않는 한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회개가 죄인 자신이 하는 일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선물이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90).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당신께 가까이 이끄신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가 없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가 없이는 회개할 수 없다”(상게서, p. 381).
“회개도 용서하심과 의롭다 하심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에게 그 선물을 주시지 않는 한 회개의 체험을 맛볼 수 없다. 우리들이 그리스도께 이끌리게 되는 것은 그분의 능력과 공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통회케 하시는 은혜는 주님께로 말미암아 이르는 것이며 의롭다 하심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다”(상게서, p. 391).
마르틴 루터도 “하나님은 용서를 주시기 이전에 먼저 우리에게 회개를 주신다”고 적절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상의 진술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 동기부여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있으며,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는 데 있다.
오늘 우리에게 첫째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경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한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일 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나아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날마다 배우도록 힘쓰자.
신앙적인 대화의 벗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신실한 한 집사님과 전화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집사님은 최근에 재림 연수원에서 열린 부흥 집회에 갔다 온 소감을 들려주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마지막 때임을 절감하게 되었다면서 나에게 들려준 그 한마디는 아직도 필자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메아리치고 있다. “마지막 때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내가 찾아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내가 찾아갈 곳은 십자가뿐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노라”는 의미 깊은 그 한마디가 지금도 필자의 마음속에 공명을 일으킨다.
라오디게아 교인으로 표상된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경험은 무엇일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할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더욱 깨달아 알고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열망이요, 소원이며,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지는 않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노라”고 공언함으로 자아만족에 빠져 있지는 않는가? 너무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문자적인 지식과 이론적인 신앙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히 깨닫고 마음으로 체험하게 될 때만이 그 사랑이 내 심금을 울리고, 내 심령을 녹이고,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켜 주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엘렌 G. 화잇이 그토록 거듭거듭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는 하나의 이론(theory)이 아니라 하나의 체험(experience)”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과 신학을 학문으로 정통할는지는 모르지만, 체험으로 얼마나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므로 그 놀라운 사랑을 베푸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는 진정한 회개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의 동기부여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다음의 영감적인 진술을 깊이 음미하면서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길목에서 걸려 넘어져 왔으며 개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개가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를 깨닫게 될 때에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거룩함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를 당신 자신에게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영혼 구원에 필수적인 회개를 일으킬 수는 없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개심을 일으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자기 자신을 회개로 이끌 수가 없다. 회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이다. 가장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대가 예수께로 나올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회개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그래서 그대의 굳은 마음이 깨어질 때까지 그분의 사랑을 명상하라.--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할지 모른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어떤 감동적인 느낌이 정점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의 슬픔이 용서를 받기에 충분히 깊어졌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일을 지체하지 말라. 죄인으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와서 전혀 무가치한 그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명상하게 하라. 그러면 그는 첫째 일을 알게 되는데,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회개할 것이 없는 회개를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Review and Herald, 1901. 9. 3).
(5)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 감화력은 무엇인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우리의 마음속에 진정한 회개를 일으키는 감화력은 성령의 역사와 감동하심이다. 성령께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심령에 회개를 일으키시는가? 성령의 사역 중의 하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주심으로 죄인의 마음속에 통회하는 심령을 일으켜 주신다. 또한 죄인의 양심을 일깨워 십자가에 나타난 죄의 흉악함을 깨닫게 해 주심으로 통회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다”(정로의 계단, p. 26).
“회개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선물이므로 예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마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성령이 양심을 일깨우는 일이 없이 회개는 있을 수 없다”(Review and Herald, 1890. 4. 1).
“회개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들이 죄를 깨닫게 하고 용서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통회하는 자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회개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53).
“그대들의 양심이 성령에 의하여 각성될 때에, 그대들은 죄의 악함과 죄의 세력과 범죄와 죄의 쓰라림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고,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p. 49).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용서하시는 사람을 먼저 뉘우치게 만드신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산상보훈, p. 7).
우리의 심령에 진정한 회개를 일으켜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으로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할 수 있으며, 죄의 흉악함을 깨닫고 죄를 슬퍼하며 통회하게 될 수 있다.
(6) 왜 회개하기를 지체하지 말아야 하는가?
“지체하는 일을 삼가라. 그대의 죄를 버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마음의 순결을 얻는 일을 지체하지 말라.--이러한 지체는 사실상 매우 위험한 것이다”(정로의 계단, p. 32).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깨우치시고 죄를 깨닫게 해주실 때, 우리가 회개하기를 지체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는 것이다. 회개하기를 지체하는 것은 왜 그토록 위험한 일인가?
① 사람의 생명이 너무나 짧고, 언제 죽음이 나에게 찾아올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가까운 우리 주변을 돌아보라. 멀리 지구촌 곳곳을 살펴보라. 날마다 들려오는 뉴스는 무엇인가? 죽음의 탄식과 울음소리가 아니겠는가? 어째서 우리는 타인의 죽음이 나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 누가 자신은 죽음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덧없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나그네가 아닌가? 오늘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나의 인생에 주어진 절호의 은혜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영원을 위하여 나에게 베푸신 절호의 은혜의 기회임을 얼마나 느끼며 준비하고 있는가?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 6:2)이 아니겠는가? 성령께서 나의 죄를 지적해 보여주실 때 지체하지 말고 지금 회개하자. 회개하기를 지체하는 것은 왜 그토록 위험한 일인가?
② 회개하기를 지체하는 것은 성령의 애소하시는 음성을 약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는 진정한 회개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루어지는 회개이다. 우리가 성령의 애소하시는 음성을 계속 거절하고 지체시킬 때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를 떠나시는 것처럼 두려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범죄한 다윗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성령이 그에게서 떠나 버리는 것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면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탄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한 영혼에게서 떠나 버리는 것처럼 두려운 일은 없는 것이다. 성령께서 나의 죄를 지적하며 보여주시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희망이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성령께서 나의 죄를 지적해 주실 때 지체하지 말고 지금 회개하자. 회개하기를 지체하는 것은 왜 그토록 위험한 일인가?
③ 회개하기를 지체하는 것은 자신의 품고 있는 죄에 정복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올 때는 회개하리라고 생각 하면서 지체한다. 지금 성령의 호소를 경솔히 여길지라도 이후에 더 좋은 감화를 받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양심의 소리를 진정시켜 버린다. 최후의 결정적 순간에 죄에서 돌이켜 회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비록 품성 가운데 한 가지의 못된 성벽이나 한 가지 악한 욕망이라도 고집스럽게 품고 버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복음의 모든 능력을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상게서, p. 34).
회개하기를 지체하게 될 때 결국은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죄의 줄에 메이”(잠 5:22)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두려운 결과인가? 성령의 호소를 따라 지체하지 말고 지금 회개하자.
“누가 과연 참된 회개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그는 지체하지 않고 자기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며, 성령께서 하나님께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한 믿음으로 인도하실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93).
④ 회개하기를 완고히 거절하는 것은 자멸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를 강제하시지 않으신다. 만일 우리의 의지가 죄를 범하고자 고집함으로 온전히 악에 쏠리게 되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받을 의사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히 배척하므로 자멸하는 것이다--그대들은 그대들의 영혼을 진실 되게 취급하라. 그대들의 육신의 생명이 위기에 처하여 있는 것처럼 열심히 또는 꾸준히 행하라. 이 일은 하나님과 그대들 개인 사이에 영원히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정로의 계단, pp. 34, 35).
이 얼마나 간절하게 호소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인가? 이처럼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를 고집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이러한 주님의 호소에 어떻게 반응하고 싶은가? 우리 모두가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겠다.
성령의 역사와 감동하심으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그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죄의 흉악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게 된다. 그러면 자복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연구해 보도록 하자.
2. 자복에 대하여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함을 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죄과가 씻음을 받고 용서함을 받기 위해서 멀고 먼 순례나 고행을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괴로운 일을 행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학대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죄를 인하여 상한 심령이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 하신다(시 51:17).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받는 조건은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것이다. 다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마음속 깊은 데서 솟아나오는 자복은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길을 찾을 것이다”(상게서, p. 38).
마음속에 자기의 죄를 숨기거나 고의로 품고 있는 자는 형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받는 길은 우리에게 회개의 선물을 주실 때에 진실되게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
(1) 참된 자복이란 어떤 것인가?
① 참된 자복은 참된 회개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죄를 뉘우치고 죄를 슬퍼하는 자는 죄를 자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러므로 자복은 결코 강요함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죄인에게 자복을 강요할 것이 아니다. 자복은 경솔하게 주의함이 없이 해서도 안 되며, 죄의 가증함을 실감하지 않는 자들에게 자복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정로의 계단, p. 38).
진정한 자복이란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죄를 슬퍼하는 결과로 맺어지는 열매요 결과인 것이다.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는 자는 죄를 자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② 참된 자복은 숨기거나 가식이 없이 진심으로 잘못을 자백하는
것이다
“죄를 자복하는 일은 공중 앞에서 하거나 사사로이 하거나 충심으로 할 것이요, 숨김이 없이 하여야 한다”(상게서, p. 38).
진실성이 없는 자복은 진정한 자복이 아니다. 숨기거나 가식이 없이 진실된 마음으로 자복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거짓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생각과 동기까지 읽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복이 진실된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아시는 분이시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펼쳐 놓고 진실되게 우리의 죄를 자복해야 한다.
③ 참된 자복은 반드시 지은 죄를 지적하여 명백하게 자백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복은 언제든지 명백하게 하고 또 지은 죄를 꼭 지적하여 자백한다. 죄 가운데는 오직 하나님께만 자복하여야 할 성질의 죄도 있을 것이고, 또는 상처를 입은 당사자에게 자복해야 할 허물도 있다. 또 어떤 죄는 공중에 대한 죄이므로 공중 앞에서 자복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자복이든지 그대가 범한 죄를 꼭 지적해서 명확하고도 요령 있게 하여야 한다”(상게서, p. 38).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면서 숨기지 아니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행 26:10, 11)다고 솔직하게 자복할 뿐만 아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하고 있다. 참된 자복에는 바로 이와 같이 솔직하고 진실된 정신이 있어야 한다.
④ 참된 자복은 죄에 대한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고 자신의 과오를
자백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하나님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왜 불순종하게 되었느냐고 물으실 때, 아담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그 범죄의 일부분은 하나님께 돌리고 또 일부분은 자기 아내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하와는 자신의 허물을 뱀에게 돌리면서, 당신이 만든 뱀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핑계하며 변명했던 것이다.
“자기변명의 정신은 거짓말 하는 자의 아비에게서부터 시작되어 모든 아담의 자손들에게 나타났다. 이런 종류의 자복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가납되지 못할 것이다”(정로의 계단, p. 40).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변명하는 것은 진정한 자복이 아니다. 진정한 자복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핑계하거나 변명하지 않으며, 범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의 죄를 변호하거나 경감시키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과 과오를 솔직하게 시인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⑤ 참된 회개와 자복은 생애의 개혁과 개선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다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가면이 아니다”(시대의 소망, p. 555).
“진정한 회개와 개선이 없는 자복은 하나님께 가납되지 못한다. 반드시 생애에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 거리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일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결과로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p. 39).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여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찌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이는 법과 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겔 33:14-16).
진정한 회개와 자복에는 반드시 생애의 개혁과 개선이 뒤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자. 오늘 각자가 자신의 생애를 성찰하면서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품고 있는 죄는 없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하겠다. 개혁과 개선이 따르지 않는 자복은 하나님께 결코 가납될 수 없는 공언에 불과한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진정한 회개와 자복이 없이도 하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2) 자복의 대상은 누구인가?
①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자복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친구나 이웃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대는 그 잘못을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를 쾌히 용서해 주는 일은 그가 할 일이다”(상게서, p. 37).
형제나 친구나 이웃에게 잘못으로 인하여 정신적인 피해나 상처를 입혔다면 당사자에게 찾아가 자복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사과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다면 잘못을 말하고 그 손해를 배상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삭개오가 한 참된 회개와 자복이었다. 당사자에게 끼친 피해는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참된 회개요 자복인 것이다.
성경은,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약 5:16)라고 권면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형제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자복이다. 상대방이 용서해 주기를 기대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자복인 것이다.
② 피해를 입은 공중 앞에 자복해야 한다
공중 앞에서 잘못을 했다면 공중 앞에서 사과해야 한다. 자신의 과오를 자복할 때 어떤 핑계나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변명의 정신은 참된 자복의 정신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공중 앞에서 시인하고, 자신의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③ 하나님께 자복해야 한다
형제에게 용서를 구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인데 어째서 하나님께 죄를 자복해야 하는가?
“그대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그대들의 죄를 자복하고, 또 그대들의 잘못을 피차에 자복하라.--그 다음으로 그대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가 상처를 입힌 그 형제는 하나님의 소유요, 그대가 그에게 상처를 입히므로 그의 창조주와 구속주에게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상게서, p. 37).
상처를 입은 그 형제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하나님께도 죄를 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은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기시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죄를 사하는 권세”(마 9:6)는 오직 창조주와 구속주에게만 속한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드시 죄를 자복해야 하는 것이다.
(3) 죄를 자복하는 자는 어떤 은혜를 얻게 되는가?
①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동정과 측은한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필요한 존재이다.
성경에 나오는 두 예배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타인을 멸시하므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입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인 됨을 숨기지 않고 자복함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다윗의 회개의 기도는 무슨 말로 시작하고 있는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것은 하나의 복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교훈하실 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 5:7)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하늘의 복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죄를 자복하는 자는 또 어떤 은혜를 얻게 되는가?
② 용서의 은혜를 받는다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속죄하시는 은혜와 용서의 은혜를 선물로 받는다. 죄인이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일이다. 죄인에게 이것처럼 감격스러운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영원한 사망의 선고를 받은 죄인이 무엇을 주고 죄의 용서와 사면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성소를 향하여 어린양을 끌고 가는 죄인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 지금 그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용서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그 죄인은 성막 뜰에서 손수 어린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고하고 전가시킨다. 그 다음에 그 어린양을 손수 죽이고 자기 손으로 그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넘겨준다. 제사장이 그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피 뿌리는 봉사를 하는 동안, 그 죄인은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께 죄를 고하는 것이다. 그 죄인에게 당면한 간절한 소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씻음과 용서의 은혜를 받는 것뿐이다. 바로 그 죄인이 그대와 내가 아닌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죄인이 아닐까?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죄를 자복하는 자는 또 어떤 은혜를 얻게 되는가?
③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자유하게 된다
죄책감(Guilt)이란 무엇인가? 사전적(辭典的)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죄책감이란 “죄를 저지른 책임감, 또는 어떤 그릇된 일을 행하였다고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불행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죄책감이란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자신에게 내려지는 도덕적 심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성서적인 관점에서 죄책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에서 생기는 양심의 가책이며, 양심의 고통인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통로는 양심이다. 양심의 소리는 의를 추구하도록 내면에서 들려오는 호소이다. 그런데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버리면(딤전 4:2) 의를 추구하는 내면의 호소는 사라지고 양심은 마비된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양심의 소리를 통하여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죄책감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증거”(정로의 계단, p. 26)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므로 죄책감이 치유되지 못하면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독소로 작용하게 된다. 죄책감은 반드시 치유되어야 한다. 그러면 죄책감은 어떻게 치유되는 것인가? 죄의 씻음과 용서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용서의 은혜를 입을 때만 마침내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죄책감은 반드시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야 한다. 거기서 용서함을 받도록 하자.
용서받지 못하는 죄책감은 사단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이 하는 일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지 못할 때 죄책감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와 반대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는 용서의 은혜와 죄책감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죄를 자복하는 자는 또 어떤 은혜를 얻게 되는가?
④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죄책감의 노예에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될 때 마침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가? 마음의 평화는 죄의 씻음과 용서를 통하여 죄책감에서 해방된 자에게 하늘이 내려 주시는 선물이다. 죄인의 마음속에 그토록 갈구하던 평화가 아닌가? 하나님이 주시는 이 평화는 아무도 흔들 수 없고,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늘의 선물이다! 이 평화를 찾으려고 얼마나 방황하며 해매였던가? 죄를 범한 죄인이 어린양을 끌고 자갈길을 걸으며 성소로 나아간 것도 이 평화를 얻으려고 찾아간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그 죄인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통하여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사단은 그를 정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롬 8:1, 2)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진정한 회개와 자복은 어떤 것인지를 고찰해 보았다. 회개를 해야 할 장본인은 물론 인간 자신이지만,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는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며, 또한 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완전한 순결을 나타내 보여주시기를 구하라”(정로의 계단, p. 28).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기 위해 간절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아 알게 해 주실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마 5:6)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가 어떠한 것이지를 더욱 깨달아 알고 체험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자.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의 제목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할 때, 그 사랑은 우리를 진정한 회개와 자복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참된 회개는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할은 사람에게 회개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요, 인간의 역할은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이 서로 협력하는 과정이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선물을 주실 때에 죄를 자복하자.” 이것이 구원의 경험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