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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ble Bridge - Adventist Movement

연구서적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별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기별이다. 이 기별은 죄인을 감동시키며 감격케 하여 회개와 헌신으로 이끌어 주는 놀라운 능력의 복음인 것이다. 영원한 사망의 선고를 받고 운명의 날을 기다리는 죄인에게 이 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있겠는가? 절망 가운데 있는 수많은 죄인들이 이 기별을 듣고 희망과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받아 왔던 것이다. 각 시대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용서와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생제물의 표상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실 구세주를 미리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며, 신약 시대 이후의 사람들은 그 표상이 가리켜 온 그 실체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믿음으로 구세주를 영접하였고, 신약시대 이후의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믿음으로 구세주를 영접하게 된 것이다. 각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가장 아름답고 희망적인 기별이다. 죄인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기별 속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는 구속함을 받는 자들의 연구와 노래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칭의(稱義)라고 부른다. 이제부터 이 복되고 아름다운 칭의의 교리를 함께 연구하고자 한다.


1. 성경에 나타난 칭의 교리의 개요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담에게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그들은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그들의 양심은 죄책감에 눌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볼 수가 없었으며, 갑자기 하나님이 두려워 숲속에 숨어 버렸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분노나 저주스러운 음성이 아니라 측은한 사랑의 음성이었다. 그들은 그 인자하신 음성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떨리는 심정으로 숲속에서 나온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상상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신다. “아담아, 저기 뛰놀고 있는 어린 양 한 마리를 이리로 끌고 오너라.” 아담은 어린 양 한 마리를 끌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 하나님은 다시 명하신다. “아담아, 그 어린 양을 저 나무에 꽁꽁 묵어라. 그리고 저기 두 돌을 가져와 서로 두들겨 날카롭게 만들어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담아, 그 날카롭게 된 돌로 어린 양의 목을 베어라.” 그 때 아담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그러면 저 무고한 어린 양은 죽고 맙니다.” 그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담아, 내가 장차 이 땅에 내려와서 저 무고한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음으로 너와 너희 후손들의 죄를 속하고 다시 구원의 길로 회복시켜 줄 것이다.” “오, 하나님, 그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다니,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정말로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저희들이 죄를 범하였나이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담아, 죄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란다. 이 길 밖에는 너와 너희 후손들의 죄를 속죄할 길이 없는 것이다. 아담아, 어서 어린 양의 목을 베어라.” 그 때 아담은 떨면서 날카로운 돌로 어린 양의 목을 베었다. 그 무고한 어린 양은 눈알을 굴리면서, 음매하고 소리치며 피 흘려 죽고 만다. 그때 하나님께서 손수 어린 양의 가죽을 벗겨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그 가죽옷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겨있는가? 그 어린 양의 피는 장차 죄인들을 대신하여 흘리실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 것이다. 그 어린 양의 죽음은 장차 죄인들을 대신하여 당하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 것이다. 그 어린 양의 가죽 옷은 죄를 씻어 주시고 입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예표하는 것이다. 바로 가죽옷을 입혀 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는 칭의의 선물을 제공하신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죄를 속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서만 죄의 씻음과 용서함을 받고 의롭게 되고 구원함을 받는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인간의 무력함을 전폭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써 그들의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무시하고 어린 양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실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죄를 범한 인간이 다시 회복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자력(自力)에 의하지 않고 타력(他力)에 의한 것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생생한 시청각교재를 통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 후로 그의 후손들은 예배의 행위로써 제사를 드릴 때마다 동물의 희생제물을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물을 통하여 속죄의 수단과 은혜의 교훈을 가르치고자 고안하신 것일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구약 시대의 모든 예배 행위에서 피조물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이 수반된 것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의 상태가 얼마나 죄악스러움을 인상 깊게 증언하는 것이었다. 무고한 피조물의 생명의 피를 흘리는 것처럼 그들의 죄된 상태가 얼마나 흉악한 것임을 이보다 더 충격적으로 기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Patrick Fairbairn, The Typology of Scripture, p. 252).

하나님은 아담에게 죄의 흉악함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와 공로와 의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인가? 아담과 하와는 너무나 황송하고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에 감격한 최초의 죄인은 아담과 하와였다. 각 시대를 통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발견하고, 깨닫고, 체험하며, 용서받은 죄인들이 느끼는 동일한 감정이 아니겠는가? 이 크신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를 황송함과 감사로 찬양하고 싶지 않은가?


(2)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하여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달 십사일 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 12:5-7).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지시하셨다. 애굽의 장자들이 죽임을 받던 그날 밤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뿌렸던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들은 모두가 구원함을 받았다.

그러면 죽임을 당한 유월절 어린 양과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진 그 피는 무엇을 예표하는가? 그 어린 양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다. 문설주에 피를 바름으로 장자의 죽음에서 구원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자만이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예표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의 어린 양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 미리 바라보았던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서만 죄의 씻음과 용서와 의롭게 되는 것과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3)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성소 뜰의 희생제물을 통하여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은 희생제물을 통하여 속죄함을 받았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희생제물을 속죄제물로 바쳤다.

제사장의 경우는 수송아지(레 4:3), 회중의 경우는 수송아지(레 4:13, 14), 족장의 경우는 수염소(레 4:22-24), 평민의 경우는 암양이나 암염소(레 5:6), 가난한 평민의 경우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한쌍(레 5:7), 극빈한 평민의 경우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레 5:11)등이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속죄제물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희생제물은 어린 양이었다.

그러면 이 모든 희생제물은 무엇을 표상하는 것인가? 그 희생제물의 피는 범죄한 인간을 대신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 것이다. 그 희생제물의 죽음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 것이다. 그 속죄제물을 바치는 자들은 피를 흘리는 그 희생제물을 통하여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속죄하시는 희생을 미리 바라보면서 구주의 보혈의 공로와 의를 자신에게 적용시켰던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서 죄의 씻음과 용서와 의롭게 되는 것과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4)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여호수아의 경험 속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여호수아는 남방 유다의 대제사장이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그들은 민족적인 회개의 기도주간을 가지고 있었다. 온 유다 민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긍휼하심을 간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사단이 나타나 그와 온 유다 민족의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 앞에 고소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도리어 책망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백성과 여호수아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서 표상적으로 하신 말씀이,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

그러면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과 새 옷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은 죄로 얼룩진 우리의 품성을 표상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새 옷을 입은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우리의 품성을 표상하는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서 죄의 씻음과 용서함을 받고, 의롭게 되며,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5)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탕자의 비유 속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눅 15:22).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의 옷은 더러운 넝마였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새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고 명하신다. 탕자는 더러운 몸을 맑은 물로 씻은 다음 제일 좋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면 탕자의 더러운 옷과 제일 좋은 새 옷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탕자의 더러운 옷은 죄로 얼룩진 우리의 품성을 표상한다. 탕자가 갈아입은 제일 좋은 새 옷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우리의 품성을 표상하는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서 죄의 씻음과 용서하심과 의롭게 되는 것과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는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혼인 예복의 비유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 이어늘”(마 22:11, 12).

임금이 배설한 혼인 예식에 참석하는 손님들이 혼인 예복을 입는 것은 당연한 도리요 예절이었다. 그런데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채로 참석한 한 사람이 있었다. 임금의 질문은 무엇이었는가?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 혼인 예복은 무엇을 표상하고 있는가?

“예복은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품성을 표상한다”(실물교훈, p. 307).

“비유 가운데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 가져야 할 순결하고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즉 믿음으로 예수를 자기의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하는 것이다”(상게서, p. 310).

그 예복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입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표상한다. 그 혼인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우리의 품성을 표상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은 어떠한 옷인가?

“하늘의 베틀로 짠 이 두루마기에는 사람이 만든 실은 한 올도 섞이지 않았다. 인성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품성을 나타내시고 이 품성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은 것이다”(상게서, p. 311).

범죄한 인간이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서 죄의 씻음과 용서하심과 의롭게 되는 것과 구원함을 받는다는 구원의 이치를 가르쳐 주고 있다.


(7)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바울의 편지서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4, 26, 28).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바울의 대표적인 편지서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이다. 이 두 편지서에 나타난 바울의 칭의관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요,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바울은 율법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패한 인간의 육체로 행하여지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 앞에 인간을 구원하는 공로나 근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의롭고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만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겨지는 공로로 가납된다는 것을 바울은 두 편지서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인의 제사가 가납되지 못한 이유는 인간의 행위를 속죄제물의 근저로 바쳤다는 점이요, 그 속죄제물 속에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가 가납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와 의가 기초한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강조점은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공로로 가납될 수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만이 의롭게 되는 공로로 하나님 앞에 인정되고 가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자신의 행위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생애는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과 일치되는 성화된 품성을 자연스럽게 열매로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은 죄를 보여주고 정죄하는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의 사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신의 성품 속에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과 일치하는 성품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간절히 열망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요지는 구원의 뿌리와 열매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라고 힘 있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8)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세 천사의 기별 속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첫째 천사의 기별의 핵심은, 인간을 자랑하지 말고 영원한 복음의 주체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 둘째 천사의 기별의 핵심은, 인간 중심의 바벨론 신앙에서 벗어나라. 셋째 천사의 기별의 핵심은, 인간 중심의 숭배를 그치고 인간 권위의 표도 받지 말라는 것이다.

세 천사의 기별 속에 흐르는 주요사상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인간 중심의 신앙에서 빠져나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 영원한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이다. 인간의 영광과 자랑을 땅 속에 파묻어 버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라는 기별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인간의 영광과 자랑을 티끌 속에 파묻어 버릴 수가 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공로와 의가 어떠함을 배우고 체험하게 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결코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인간의 영광과 자랑은 저절로 티끌 속에 파묻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 앞에서 인간의 자랑은 심히 어리석고, 부끄럽고, 창피스럽고,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엘렌 G. 화잇은 적절한 언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가운데 묻어버리고,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p. 456).

그러므로 세 천사의 기별은, 인간 중심의 신앙에서 탈피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가 세 천사의 기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 속에 칭의 교리의 개요가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를 고찰해 보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칭의 교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떠한 것인지를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자.


2. 칭의 교리의 구체적 내용


(1) 하나님의 의(義)의 개념은 무엇인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이 하나님의 의 때문에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의(義)의 개념이 무엇인가? 이것이 칭의 교리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열쇠이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마르틴 루터가 복음을 발견하게 된 경험을 살펴보자. 루터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를 가장 떨게 만든 것은 “의(義)”라는 말이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지배적 속성은 공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의는 죄를 범한 자에게 보복하는 “보복적 공의(retributive justice)” 또는 징벌을 내리는 “징치적(懲治的) 공의”의 개념으로 생각해 왔다. 이처럼 중세기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단지 율법을 범하여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심판하는 척도의 개념에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31편 1절의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기도는 루터에게 납득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의”라는 단어가 루터의 귀에는 죄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두려운 심판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그릇된 신학사상이 그 당시 루터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의 불의함을 볼 때 그는 율법을 범한 자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면서 절망 가운데 빠져 있었다.

그 때 그는 신약성경으로 돌아가 로마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복음”이란 단어와 “구원”이란 단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구원이란 단어는 루터가 수년 동안 고행을 통하여 찾아 헤매던 반가운 말이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 “복음이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기뻤다. 그런데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기쁨은 사라져 버리고 절망 가운데 빠져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보복하시고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복음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고민 속에 빠지게 된 것이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복음 자체를 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복음이란 말은 율법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다른 표현인가?”라고 질문을 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로마서를 읽어 내려갔다. 로마서 3장 21절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구절을 대하는 순간 갑자기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가 무엇일까?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는 인간에게 요구하는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제공하시는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입혀주심으로 그를 의롭게 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이다!”

루터는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제공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주심으로 그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루터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는 너무 기뻐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증거하기를, “그것은 마치 내가 다시 태어난 것과 같았으며, 별안간 성경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하나님의 의’라는 바로 그 구절이 지금은 내가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그 구절은 나에게 낙원의 문이 되었다”고 진술하였다(Luther’s Works, Concordia Publishing House, vol. 34, pp. 336 f.)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성과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부질없는 시도와 대조시키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마련하신 의이다”(SDA Bible Commentary, vol. 6, p. 501).

그러므로 칭의의 교리에 있어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의”의 개념은 자력에 의한 의가 아니라 타력에 의한 의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입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는 것이다.


(2) 칭의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 즉 칭의의 의미는 무엇인가?


① 칭의란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 입혀진다는 뜻이다

“주님의 완전하신 순종으로서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주장들을 만족시키셨으며, 나의 유일한 소망은 나를 위하여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신 나의 대치물이요 담보물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데 있다. 주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율법의 정죄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요구에 응답이 되는 당신의 의로써 나를 옷 입혀 주신다. 나는 영원한 의를 가져다 주시는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짜지 않은 흠 없는 두루마기를 나에게 입히시고 하나님께 나를 제시해 보이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96).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 없는 품성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고, 당신의 순결을 우리의 것으로 아버지 앞에 제시하신다”(Review and Herald, 1892. 7. 12).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선물인가? 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혜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인가? 아무런 공로도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성경을 가진 종교는 은혜에 기초한 종교이다. 이러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격케 만드시고, 감동시키셔서,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감사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을 찬양하자.



칭의란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간주하시며,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키시며 온 우주 앞에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92).

본질적으로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고 입혀졌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전가시켜 주시고, 온 우주 앞에서 나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이 은혜를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 때문에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의 아름다운 언어를 총동원해도 이 은총을 다 형용할 수 없고 다 묘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죄를 취하시고,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제안하신다. 그대가 지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분을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인다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분의 공로 때문에 그대는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받아들인바 된다”(정로의 계단, p. 62).

참으로 놀라운 복음이다! 이 복음의 기별을 들을 때 너무 감격스럽지 않은가? 엘렌 지 화잇은 이 기별을 들을 때 너무 감격스러워서, “나의 모든 세포, 세포마다 아멘, 아멘 하고 화답하였다”고 말했다. 이것이 죄인을 구원하는 이름다운 복음의 기별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다.



③ 칭의란 하나님께서 나를 의로운 사람으로 취급하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히시므로 우리들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며, 의인들처럼 취급하신다” (가려 뽑은 기별, 1권, p. 394).

“인간의 실패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영혼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그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취급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신다”(상게서, p. 367).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그의 공로와 의를 의지해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한 죄인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죄인의 신분이 아니라 의인의 신분으로 대우를 받게 된다. 또한 외인의 신분으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의 신분으로 받아주신다.

이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탕자의 비유이다. 어느날탕자는 자신의 비참하고 가련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탕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고 결심한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만을 신뢰하고 탕자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탕자는 그저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종으로 받아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잔치를 배설하며, 모든 사람들 앞에 (온 우주의 거민들 앞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아버지는 종의 신분으로 그를 취급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으로 대우하셨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더 이상 정죄하지 않으시며 죄인으로 취급하시지도 않으신다. 전혀 죄가 없는 의인으로 대우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결하시고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그가 입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의 품성을 대신하여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이것이 바울과 루터를 감격케 만들었던 복음이었다.

바울과 루터가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너무나 감격하여 그리스도를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그들을 감격케 만들었던 이 복된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울려주고 있지 않은가?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기쁜 소식이 아닌가? 범죄로 말미암아 죄책감에 빠져 절망하는 죄인들에게 이것처럼 기쁜 소식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시며,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이끄는 동기부여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칭의의 기초는 무엇인가?


칭의는 인간의 공로나 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에 기초한 것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의 기초와 토대는 우리 자신의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만이 하나님 앞에 가납될 수 있는 유일한 공로와 의가 되는 것이다.

한때 바울은 율법을 철저히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발견한 후에는 그러한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깨달았으며,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울과 루터가 발견한 복음이었다. 하나님의 한 의는 곧 그리스도의 의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입혀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이다.

“우리의 행위와 품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는 칭의에 있어서 긴요한 열매이다. 그러나 우리의 칭의는 이 열매들 위에 기초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근원과 근거는 우리의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이다.--우리는 열매와 뿌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한스 K. 라론델,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p. 64).


칭의는 인간의 선행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 24).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3-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 칭의를 얻을 수 있는 공로가 결코 되지 못한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기초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행함으로 어떤 공로를 찾으려는 생각이나 노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폐지시키고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단호히 거부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여기서 주의할 것은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리는 위치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또한 율법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요지는 율법을 통해서 의를 이루려는 행위와, 구속하시는 은혜를 통해서 의를 이루는 방법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만 사람은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하여 의롭게 된 자의 생애의 열매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고 조화되는 성품의 열매가 자연히 맺혀지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그토록 강조하는 요지는 구원의 기초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제공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에 있는 것이요,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혜는 어떤 것인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마련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는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저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그의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의지에 전적으로 복종하심으로써 인간을 위한 속죄제물과 화목제물로 죽으시고, 인간을 위한 보증인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대속적인 죽으심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러한 구속의 계획과 성취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결코 칭의의 선물이나 구원의 선물을 얻을 길이 없는 절망적인 존재일 뿐이다.


(4) 칭의를 얻는 조건은 무엇인가?


칭의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칭의를 얻는 데는 조건이 있다. 칭의를 얻는 조건은 믿음과 회개이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연구해보도록 하자.


① 칭의는 믿음으로 얻어진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얻는데 있어서 왜 믿음이 중요한가?

첫째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이 중요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인간의 구원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역할은 구속의 은혜를 제공해 주시는 것이며, 인간의 역할은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믿음의 손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하신 말씀은,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치료의 은혜를 받는 유일한 수단은 곧 “믿음”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이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도 곧 “믿음”이다. 오직 믿음으로 죄의 씻음과 용서와 칭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중요하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조건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3, 20, 21).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의로우신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약속하신 그대로 능히 이루실 것을 믿었으므로 의롭게 된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에게 죄의 씻음과 용서의 선물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주심으로 의롭게 된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의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약속이며, 그 의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이야말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며, 믿음은 확신뿐만 아니라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89).

믿음은 확신과 신뢰가 다 포함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신 약속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것이 곧 참된 믿음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임을 우리가 확신할 때 그분이 주신 약속을 의심 없이 신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성취될 것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믿음으로만 우리는 의롭게 되는 칭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죄인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을 받기 위하여 내뻗는 손과 같다.--하나님께서는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언제나 기다리시며 원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보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 때문인 것이다. 그 선물은 우리가 받아야 할 우리의 것이며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받는 것이다”(SDA Bible Commentary, vol. 6, p. 502).


② 칭의는 회개함으로 얻어진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정로의 계단, p. 23).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데, 죄를 회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지 모른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왜 회개가 칭의의 한 조건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죄인을 의롭게 여기실 수 있지만 어떤 사람도 알고 있는 죄를 그대로 행하거나 알고 있는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그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로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칭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완전한 마음의 복종을 요구하신다”(Review and Herald, 1890. 11. 4).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어주는 외투가 아니다”(시대의 소망, pp. 555, 556).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라도 가리워 주지 않을 것이다”(실물교훈, p. 316).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를 용인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죄를 용인하지 않으셨다. 그는 아담과 가인의 죄를 용인하지 않으셨고, 또한 어떤 다른 사람의 죄라도 용납하지 아니하실 것이다”(상게서, p. 316).

이상의 진술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하나님은 죄를 결코 용납하는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은 죄와 상반되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은 사랑하시지만 죄는 철저히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결코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 주실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어 주는 외투가 아니다.

매우 단순하게 진술된 성경의 기별은, “회개가 없이는 구원도 없다 (no repentance, no salvation)”는 것이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침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하였다(마 3:2, 8).

예수님의 복음 전파는 회개하라는 기별로 시작하셨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사도들도 회개의 기별을 전파하였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우리는 여기서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만일에 한 개인이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속죄와 용서의 은혜를 받을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는 회개하지 않은 죄를 덮어 주기 위하여 입혀 주시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죄를 버린 자에게 입혀 주시는 의이다.


(5) 칭의를 얻은 증거는 무엇인가?


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칭의의 은혜를 입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면 내 자신이 칭의의 은혜를 얻은 증거는 무엇인가?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찬양하고 싶은 충동과 열망이 자발적으로 계속 일어나게 된다

칭의의 은혜를 체험한 그리스도인은 죄인된 자신을 구속하시고, 용서해 주시며,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깊이 깨닫기 때문에,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오직 성부 하나님과 구주되신 그리스도께 돌리고 싶은 충동과 열망과 소원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의 마음의 주인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시고, 그의 마음속에 명상하기를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입술에서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어린 양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된다. 그는 비로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의 고백은 입술의 공언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의 고백이요, 신앙고백인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를 구속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싶은 충동과 열망과 소원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자발적으로 계속 솟구치고 있는가를 검증해 보자.


자신의 마음과 삶 전체를 송두리째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헌신의 마음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헌신은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으로 반응하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나를 구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 우주보다 더 소중한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나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충동과 열망에서 시작된 헌신이다. 사랑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일깨워진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셨음을 깨달았을 때, 나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과거에는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인 줄 알았고, 또 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창조와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마음, 나의 재능, 나의 재물, 나의 생명, 나의 삶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살고자 송두리째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생애에는 이러한 헌신이 자연스러운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헌신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솟구치고 있는지를 각자 스스로 검증해 보자.


③ 인간의 영광을 땅속에 파묻어 버리게 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9).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롬 3:27).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깊이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죄인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하여 죄의 씻음과 용서함을 받고,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어 구원함을 받게 되는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어찌 인간의 영광을 자랑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공로 앞에 저절로 인간의 영광은 티끌 속에 파묻어 버릴 수밖에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파묻어 버리고 인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p. 456).

인간 자신의 영광과 자랑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공로 앞에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만이 나의 희망이요 생명이요구원임을 절절이 깨닫고 체험한 자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신을 자랑하는 행위가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임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신성의 참여자들이 되었을 때에 자신을 높이는 모든 행위가 가증하게 보이고, 지혜라고 사랑했던 것이 찌꺼기와 쓰레기로 보일 것이다”(Review and Herald, 1892. 11. 29).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의 생애 속에는 아름다운 선행의 열매들이 분명히 맺혀지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그들의 자랑거리가 결코 되지 못한다.

또한 신앙적 업적이 자신의 영광으로 자랑되지도 않는다. 그가 어떤 선한 업적을 이루었다면 그에게 힘과 재능과 도우시는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자랑거리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용서하시며, 의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변화시키셔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뿐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 앞에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깨닫기 때문에 인간 자신의 영광과 자랑은 저절로 땅속에 파묻어 버리는 경험을 갖게 된다.


④ 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으면 죄를 즐기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실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상게서, 1890. 11. 4).

그리스도 없이 방종하는 상태를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 3).

과거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데로 죄를 즐기며 살았다. 그러나 죄인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깨닫게 된 후에는 과거에 즐기던 죄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는 신령한 기쁨이 그를 사로잡게 된다. 이전의 즐기던 취미는 더 이상 그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으심은 자신의 죄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깨닫게 되고, 죄를 슬퍼하며 미워하게 된다. 동시에 죄에 대한 흥미는 사라지게 된다.

과거에 나의 생각과 애정과 의지를 사로잡았던 죄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검증해 보자.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자복하지 않은 죄를 마음속에 여전히 품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깊이 살펴보자. 한때 즐기던 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신령한 사물을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고 검증해 보아야 한다.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가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울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제공된 속죄를 받아들였다. 그는 마치 실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자신을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의를 얻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방법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겼다.--바울은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죽었지만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매우 풍성하게 살아 있었다. 회심한 후에도 그는 이전과 같이 활동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비활동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SDA Bible Commentary, vol. 6, p. 951).

죄와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완전히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새롭게 사는 자가 된다.

죄와 세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인생의 목적과 뜻과 가치관이 완전히 새롭게 변하게 된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때에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 안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곧 그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실물교훈, p. 312).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 곧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한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칭의를 얻은 자연스러운 증거이다.


(6) 칭의를 얻은 결과는 무엇인가?


① 용서함을 받는다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슥 3:4).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칭의는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이다.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바로 그때에 그는 용서함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의는 그에게 입혀지는바 되고 죄인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SDA Bible Commentary, vol. 6, p. 1071).

사형집행을 선고받은 한 사형수가 독방에 갇힌 채 두려움 속에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이미 그는 정신적으로 죽은 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집행관이 그에게 사면장을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그 사면장에는 무죄석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사면장을 받는 순간 그 사형수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그 사형수가 느끼는 감정을 오늘 우리는 느낄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공로 덕분에 하나님 앞에 완전한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감격스러움을 느끼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가?


② 영혼의 치유함을 받는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양심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죄책감의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마음의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야 한다. 양심을 괴롭히는 무거운 죄의 짐은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죄를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죄의 씻음과 용서함을 얻게 된다. 죄의 용서함을 받았을 때 그의 영혼의 질병은 치유함을 받게 된다. 영혼의 치유함을 받은 그 사람은 마침내 마음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괴로워하던 그에게 이처럼 큰 기쁨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 땅에 수많은 약국과 병원들이 있지만 영혼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약도 없고, 치유할 수 있는 의사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영혼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요,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혼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이시다.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마음의 참된 쉼을 갈망하는 영혼은 그리스도를 쳐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와야 한다. 바로 그분으로부터 영혼을 치유하는 은혜가 흘러나온다.

“죄로 병든 영혼을 위한 치료제가 있다. 그 치료제는 예수님 안에 있다. 얼마나 귀하신 구세주이신가! 그분의 은혜는 가장 연약한 자에게 충분한 은혜이다”(교회증언, 1권, p. 158).

“이제 위대한 치료자께서 우리의 주목을 요구하신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단지 우리가 우리의 죄를 보고, 비참한 상황을 이야기 하고, 한탄하고 있는 한, 우리의 상처와 곪아가는 아픔은 계속 남을 것이다. 우리에게서 눈을 돌려 높이 들리신 구주께 고정할 때, 바로 우리의 영혼이 희망과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Signs of the Times, 1894. 4. 2).

이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영혼의 치유함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의 참된 쉼과 자유와 평화를 맛보자.


③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8, 19).

사법적 관점에서 볼 때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관계요 불목의 관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화목의 주도권을 행사하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당신 자신과 화목케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 시키는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아니요 화목의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회복된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의지해서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롬 5:1)게 된 것이다.


④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1).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되는가를 정리해 보자.

첫째로,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전가되어 입혀진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의로 대치된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품성으로 대신하게 된다. 넷째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는 자를 의인으로 간주하시고 의인으로 여겨 주신다. 다섯째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는 자를 의인으로 취급하신다.

이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인가? 이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놀라운 복음이다! 이것이 바울과 루터가 발견한 구원의 진리요, 복음의 진수이다.

영원한 사망의 선고를 받고 운명의 날을 기다리는 죄인에게 이처럼 반갑고 기쁜 소식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놀라운 구속의 은혜이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자.


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롬 8:14-16).

“15절에서 양자의 신분의 위치는 고용된 종(servants) 또는 노예로된 종(slaves)의 신분과 대조되고 있다.--사람이 율법 아래 사는 한 그는 노예로 된 종이다.--종으로서 그에게는 물려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 뿐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될 때, 그는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바뀌게 된다. 심판자의 진노 대신에 이제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에게 임하게 된다. 종의 두려움 대신에 이제 그는 아들의 신뢰와 확신을 가지게 된다”(SDA Bible Commentary, vol. 6, p. 566).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온 우주의 왕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며 영예이며 기쁨인가! 지금은 이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장차 하늘에 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귀한 특권임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시며,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시켜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자.


⑥ 구원과 영생의 보증을 받게 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 12).

구원의 차원은 크게 두 가지 국면이 있다. 첫 번째 국면은 죄의 권세에서의 구원이요, 두 번째 국면은 죄의 영향과 환경에서의 구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죄의 종노릇에서 구원함을 받는 것이다. 더 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게 된다.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는 죄의 영향과 환경에서 피할 수가 없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마침내 죄의 영향과 환경에서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지금 이 땅에서 구원과 영생의 보증을 받은 것이며, 이러한 보증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⑦ 거듭남을 경험하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의 생애 속에는 거듭남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전 것들은 다 지나가고 새로운 것들로 바뀌게 되는 영적 경험이 그의 생애 속에 나타나게 된다. 이 거듭남의 문제는 다음 주제에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⑧ 성화의 생애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는 동시에 성화의 생애를 시작하게 된다. 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칭의와 성화는 평생 동안 함께 병행하는 경험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칭의와 거듭남과 성화의 경험에 대하여 논쟁을 벌여왔다. 이러한 논쟁이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개념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인 생애의 경험에서는 동일한 시간에 동시에 일어나는 경험이기 때문에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다. 참된 칭의의 경험을 하는 순간 거듭남과 성화의 경험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늘 우리 주변에 떠돌고 있는, 회개의 열매가 수반되지 않은 입술의 공언만으로도 칭의가 성립된다는 잘못된 칭의의 개념이 아니라,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가 수반된 참된 칭의의 경험에는 동시에 거듭남과 성화의 생애가 시작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라는 우산 밑에는 입혀주시는 의 즉 칭의와, 나누어 주시는 의 즉 성화가 함께 병행한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입혀주시는 의 즉 칭의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증이요, 나누어 주시는 의 즉 성화는 하늘나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적합성이다. 성화에 관한 문제도 하나의 주제로 선정하여 좀 더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3. 칭의 교리의 중요성


성경에서 가장 복된 기별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칭의 교리가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1) 구원의 진리의 핵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한 후에 그는 그 어느 인간을 찾아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 광야로 나아갔다(갈1:15-18). 3년 동안 광야의 신학을 통하여 그가 발견한 진리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롬 3:21)”를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셨는데, 그 의는 곧 그리스도의 의이며, 그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이다. 바로 이 진리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기록한 그의 편지서들 속에 흐르는 중심사상이다. 특별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의 용서와 의롭게 되는 놀라운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스스로 선을 이룰 수도 없고, 그 선한 행위가 구원의 공로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만이 하나님 앞에 가납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토대요 기초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고 가납될 수 있는 것이다.

“칭의의 문제를 일단 잃어버리게 되면, 그리스도교의 모든 참 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의를 벗어나는 사람은 ‘율법의 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게 되면 자기 행위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칭의의 문제를 등한히 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이 문제를 계속적으로 가르치고 반복하는 일이다”(Luther on Galatians, pp. 136, 148; A. G. Daniells, Christ Our Righteousness, pp. 90, 91).

“사람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음조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라는 말이다”(Review and Herald, 1895. 4. 4).

“그리스도 우리의 의(義)의 기별은 거룩한 성경이 나타내는 최고의 기별이다. 아무리 여러 가지 형태와 말씀들로 이 기별이 표현되고 제시될지라도, 그 어느 점으로 보나, 강조되는 중심적인 주제는 「그리스도 우리의 의」이다”(A. G. Daniells, Christ Our Righteousness, p. 9).

칭의의 교리가 없이는 거듭남과 성화의 교리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교리는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진리의 기둥이요 핵심이 되는 진리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2) 영혼을 치유하는 유일한 복음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범죄와 타락으로 죄인이 되어버린 인간에게 내려진 선고는 영원한 사망이다. 정한 때가 되면 훌훌 털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나그네가 아닌가? 사망의 그늘 아래서 탄식하며 절망에 빠져 버린 죄인에게 그 무슨 말이 위로가 되며 소망이 되겠는가?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나그네에게 무슨 말이 위로가 되며, 그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는 기별이 아니겠는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어떤 죄도 깨끗이 씻을 수 있고, 용서와 평화와 자유를 줄 수 있다는 기별이 아니겠는가?

오늘 우리 주변에는 영적으로 치유함을 받아야할 영혼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그들은 죄책감에 억눌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 마음의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갈망하는 자들이다. 이 땅에서 아무런 소망 없이 죽어가는 영혼들이다. 그들의 아픈 상처와 곪아가는 아픔을 치유하고, 소망과 화평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 뿐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며, 죽음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영혼을 치유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제공해 주시는 그리스도, 죽음의 두려움을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는 그리스도를 높이 쳐들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 되시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 되심을 크게 외쳐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만이 영혼을 치유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칭의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3) 죽어가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기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얼마 전 서울에 계신 한 장로님과 전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메아리치는 한 마디가 잊을 수가 없다. “오늘날 시대는 말씀은 풍성한 것 같으면서도 말씀이 없는 시대인 것 같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시들어가고 죽어가는 교회를 다시 살리고 부흥시킬 수 있는 기별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죽어가는 교회를 다시 살리고 부흥시킬 수 있는 기별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다!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마음 가운데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종교의식은 단지 죽음이며, 얼어붙은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는다”(Review and Herald, 1888. 4. 17).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문제와, 그와 관련된 분명한 진리들을 가르치지 않는 까닭에 우리 교회들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복음사역자, p. 301).

이 기별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더 이상 어떻게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고 부흥시킬 수 있는 기별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라고 힘 있게 외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별자의 지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 기별이 영혼을 회심시키며, 시들어 죽어가는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기별이라면, 우리 모두가 이기별을 연구하고, 깨닫고, 체험해야 하지 않겠는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1888년에 참으로 각성을 일으키는 특별한 기별을 받았다. 당시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라고 불렀다.--당시 그 기별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기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오랫동안 그들은 언젠가 이 기별이 우리에게 매우 뚜렷하게 증거될 것이라는 것과, 이 기별이 교회를 깨끗케 하며 중생케 하는 역사를 완수할 것이라는 것을 깊이 확신하고 희망해 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기별을 주께서 그분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보내신 줄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Arthur G. Daniells, Christ Our Righteousness, p. 23).

칭의의 교리는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고, 깨끗케 하며. 부흥시키는 기별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4) 라오디게아 교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라오디게아 교회는 기독교 시대 중 가장 마지막 시대에 속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바로 오늘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 한 마디로 “미지근한 상태”(계 3:14-16)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아니 하”(눅 7:32)는 영적 무감각 상태에 깊이 빠져 버렸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종교계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 영적 무감각 상태에 깊이 빠져 졸고 있다. 영적 무감각, 영적 무반응, 자기만족, 자기기만 속에 빠져버린 것이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상태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스스로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고 자만한다. 그러나 참된 증인(계 3:14)은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있는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라고 지적하고 있다. 영적으로 곤고한 상태, 가련한 상태, 가난한 상태, 눈 먼 상태, 벌거벗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두렵고 엄숙한 시기에 처한 우리의 상태는 어떠한가? 슬프도다. 교회에 만연된 이 교만, 이 위선, 이 기만, 의복에 대한 사랑과 경솔한 언동, 향락에 대한 사랑, 이 지위욕, 이런 것들이 다 무엇인가? 이런 모든 죄악들이 마음을 어둡게 가리고 있어 영원한 사물들이 분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Review and Herald, 1887. 3. 22).

참된 증인(계 3:14)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고 권고하고 있다. 믿음과 사랑으로 부요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의의 흰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고, 성령의 역사를 통한 영적 식별력으로 영적 사물을 식별하라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식별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5) 세 천사의 기별의 핵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계시록 14장의 위대한 삼중기별은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는 용어로 대표된다”(A. G. Daniells, Christ Our Righteousness, p. 65).

“셋째 천사의 기별”이란 용어는 세 천사의 기별을 포괄하는 대표적 별칭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혼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1888년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제시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들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 기별이 셋째 천사의 기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한 의문이 생겼다. 이 문제에 관하여 엘렌 G. 화잇의 의견을 듣고자 편지를 써 보냈다. 이것에 대한 답변을 들어보자.

“몇몇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셋째 천사의 기별인지 아닌지를 질문하는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그것은 진실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라고 대답했다”(Review and Herald, 1890. 4. 1).

세 천사의 기별에서 외적으로 대두되는 마지막 대쟁투의 논쟁점은 하나님의 인이 되는 안식일과 짐승의 표인 일요일 준수이지만, 그 논쟁점에 기초하고 있는 근본적인 사상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충성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바칠 것인가 아니면 인간과 사단에게 바칠 것인가의 문제이다.

세 천사의 기별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가? 인간의 영광을 자랑하지 말고 영원한 복음의 주체시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 인간 중심의 바벨론 신앙에서 탈피하라. 인간 중심의 숭배를 그치고 그 인간의 권위의 표도 받지 말라. 한마디로 인간 중심의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세 천사의 기별의 핵심적 사상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칭의의 교리가 세 천사의 기별의 근본적인 사상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별은 교회 안에서도 전파되어야 하고, 세상을 향하여서도 외쳐야 할 중요한 구원의 기별인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선포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기별이다. 그것은 셋째 천사의 기별인데, 큰 음성으로 선포될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이 대량으로 수반되는 기별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p. 92).

이 세상에 최종적으로 외쳐져야 할 기별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의 기별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교리는 매우 중요한 기별이다.


(6) 늦은비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기본적인 준비의 기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깨어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서 한결 같이 늦은비를 위해 준비하자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참으로 그 일을 위해 시간과 정력을 바쳐야 할 절호의 기회가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마지막 은혜의 시기이다. 하늘 지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업이 머지않아 곧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가장 근본적인 준비가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겠는가? 필자는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다.

첫째로, 이른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깨닫고,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동되여, 돌 같은 마음이 녹아지고 변화되는 경험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진정한 회개와 자복이 일어나며, 속죄와 용서의 확신 속에,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체험하게 된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나의 마음과 나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하나님의 제단 앞에 헌신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게 된다.

둘째로, 자신의 죄악됨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 무가치함을 절감함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옷 입는 체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에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나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찬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는 칭의의 경험과 함께 자연스럽게 거듭남과 성화의 생애로 나아가게 되며 그리스도와 굳게 연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셋째로,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너무 감격하여, 그 구속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과 열망이 솟구치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그때 자신의 처한 환경과 입장에서 이 놀라운 구속의 진리를 전하는 일에 온 마음과 재능과 재물과 시간을 바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의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할 때 저절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과정일 뿐이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쓰(William Booth)는, “하나님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전도하게 한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의 순서요 원리인 것이다. 회개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며, 헌신이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지 못한 봉사와 전도가 무슨 힘이 있는가? 진정한 신앙의 원동력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그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가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몸소 체험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 모든 단계는 자연스럽게 열매로 맺어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가장 치열한 활동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할 만큼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게 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깨달을 수 없게 하려고 굳은 결의를 하였다. 아, 우리가 어떻게 함으로 하나님의 깊고도 고귀한 사랑을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는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가려 뽑은 기별, p. 156).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선포하는 기별이 바로 세 천사의 기별인 것이다. 이러한 기별이 외쳐질 때 늦은비가 대량으로 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선포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기별이다. 그것은 셋째 천사의 기별인데, 큰 음성으로 선포될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이 대량으로 수반되는 기별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p. 92).

늦은비 성령의 부으심이 대량으로 수반되는 기별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의 옷을 입은 자들의 수가 찼을 때 늦은비는 임할 것이다.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칭의의 기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7) 마지막 환란 날에 설 수 있는 자격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만약 그대들이 환란의 때를 견디기 원한다면 그대들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며, 회개한 죄인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주님의 의의 선물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Review and Herald, 1892. 11. 22).

마지막 남은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환란이 있다. 선악간의 대쟁투의 마지막 국면은 일곱 재앙이 내림과 동시에 사단의 맹렬한 공격으로 야곱의 환란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출 애굽 당시 어린 양의 피로 문설주에 뿌린 자들만이 하나님의 보호함을 입었던 것처럼, 마지막 대 환란의 때에 일곱 재앙에서 보호함을 입을 자는 그리스도의 피를 마음의 문설주에 뿌려 정결케 된 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자들뿐이다. 사단이 우리의 죄들을 상기시키면서 우리를 낙담시킬 때에 무엇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나의 죄를 씻어주시고 정결케 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 밖에는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나, 자기 의를 신뢰하는 자들, 자기만족과 자기기만에 빠진 자들은 그 날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다음의 성경구절은 우리의 신앙을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에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 3:11-13).

불같은 시련과 환란의 날에 인간의 행위에 기초한 의는 짚처럼 불태워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인간적인 업적과 성취를 공력으로 세우는 자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만을 믿음으로 굳게 의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마지막 대 환란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경험을 가진 자만이 그날에 굳게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본장에서 “나를 의롭게 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만을 믿음으로 굳게 의지하라”는 주제를 연구해 왔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지를 연구해 왔다. 우리의 생애 속에 칭의의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도록 하자. 날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경험을 하도록 하자. 그리고 나를 의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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