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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ble Bridge - Adventist Movement

연구서적

구원의 선물
2015.10.10 08:37

제 7 장 거듭남을 체험하라

그리스도인이 필수적으로 체험해야 할 영적경험 중의 하나는 거듭남의 경험이다. 거듭남의 경험이 없으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거듭남의 경험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영적생애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적이 없으므로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교인은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정직하고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은 한결 같이 진정으로 거듭남을 체험하기를 소원한다. 그들은 “과연 내가 거듭났는가? 아니면 아직도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나는 과연 구원을 얻을 것인가?” 등등의 질문을 하면서 혼자 갈등 속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남의 문제에 대하여 혼돈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거듭남의 문제를 함께 연구하고자 한다.


1. 거듭남의 중요성


왜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거듭남의 문제가 중요하며, 왜 그토록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는 것인가? 마음속에 건설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외면의 형식적인 신앙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진정한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이론과 형식과 종교의식과 제도에 충실하면 마치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형식주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1) 형식주의 신앙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그토록 중요한 거듭남의 경험을 추구하지도 아니하며 타성에 젖은 형식주의 신앙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형식주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닫지도 못하고 자아만족에 빠져있다. 그러면 형식주의 신앙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① 형식주의 신앙은 이론과 형식과 의식에 만족해 버리는 신앙이다

“외형주의의 복음은 사람의 마음에 호감을 준다. 그것은 교양과 도덕의 형태, 예배와 성찬식과 교회 질서의 형태, 전통주의와 자선 사업의 형태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우상으로 등장하게 될 때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대신에 그것들을 의존하게 된다”(G. G. Findlay,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pp. 42, 43; A. G. Daniells, Christ Our Righteousness, p. 76).

“진리의 이론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신조를 불신자들에게 제시하는 일이 그대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Review and Herald, 1891. 2. 3).

“우리가 냉랭한 진리의 이론을 증거하는 일에 만족해 온 것이 우리의 사업에 문제가 되어왔다”(상게서, 1889. 5. 28).

“그는 그 진리를 지적으로 이해한 것뿐이고, 자기의 마음속의 성소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진리에 관하여 지적 신앙 이상의 것을 가져야 한다”(상게서, 1899. 2. 14).

이처럼 형식주의 신앙은 외형적인 신앙이요, 이론과 형식과 의식에 만족해버리는 신앙이다. 냉랭한 진리의 이론으로 만족해버리는 신앙이요, 지적으로만 이해하고 진리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마음의 성소에 적용되지 못한 신앙이다.

형식주의 신앙은 머리로만 깨닫고 외면적인 것에 중점을 두며, 이론으로 그치고 만다. 그것은 형식과 겉치레 이상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그것은 기쁨도 없고 사랑이 없는 건조한 신앙이다.


② 형식주의 신앙은 성령의 역사함이 없는 메마른 신앙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지 않고 그 교훈을 순종하지 않는 말씀을 설교하고 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은 말씀을 설교하고 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성화되지 않고 거룩해지지 않았다.--만일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게 되면, 무기력한 학문적인 종교를 가지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산 능력, 곧 예수님의 영으로 흠뻑 젖게 될 것이다”(상게서, 1893. 1. 31).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교리와 이론을 제시하지마는 그들의 설교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 없는 봉사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상게서, 1892. 11. 29).

“은혜의 기름이 그들(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활동에 섞이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는 참된 핵심이 없는 마른 껍질이었다. 그들은 교리의 형식을 굳게 붙들었으나 그들의 그리스도인 생애에서는 기만당하여 독선이 가득하고 만일 그들이 배웠다면 구원받을 만큼 지혜롭게 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Review and Herald, 1894. 3. 27).

형식주의 신앙은 예수님의 영으로 흠뻑 젖지 못한 신앙이요, 성령의 역사함이 없는 메마른 신앙이며, 참된 핵심이 없는 마른 껍질의 신앙이요, 무기력한 학문적인 신앙이다. 혹시 우리가 이러한 형식주의 신앙에 안주하여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겠다.


③ 형식주의 신앙은 진리가 체험화 되지 못한 이론적인 신앙이다

“진리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진리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우리들의 지식은 실제로 체험한 지식이 되어야 한다”(상게서, 1887. 5. 24).

“교회의 녹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많은 사람들의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진리가 성소의 뜰에 보존되어 있다. 거기에는 참된 회개도, 마음속에 적극적인 은혜의 역사도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은 자기들의 성향에 근거된 것이지, 성령으로 말미암는 깊은 각성에 근거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구주로 영접하노라고 공언하지마는 그분께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계신 구주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품성의 많은 결함을 나타낸다”(상게서, 1904. 7. 7).

“많은 형식과 조직과 신앙고백이 있지마는 보다 깊고 견고한 그 무엇이 우리의 신앙 체험 속에 들어와야 한다.--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체험적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그분의 사랑의 능력을 깨닫는 일이다”(교회증언, 5권, p. 743).

진리가 체험화 되지 못한 이론적 신앙은 결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진리가 심령에 깊이 심어질 때만 우리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난다. 진리가 심령에 보존되지 못하고성소의 바깥뜰에 보존하는 신앙은 형식주의 신앙에 불과한 것이다.


형식주의 신앙은 진정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건조한  신앙이다

“사람이 즐겁고 재미있는 설교를 하면서도 신앙상 체험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와 멀리 떠나 있을 수도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표준에까지 도달되어 있으면서도 품성을 변화시키는 은혜의 내적 역사는 결코 체험하지 못했다. 그와 같은 사람은 거룩한 복음의 진리와 관련되고 친숙해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속고 있다”(Review and Herald, 1899. 2. 14).

“만일 마음이 진정으로 변화되지 못하면, 교회의 신조를 지키겠다고 서명하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사람들이 교인이 되어 외관상으로는 열심히 일하고 해마다 맡은 의무를 이행하고 있으면서도 회심하지 않을 수 있다”(상게서, 1899. 2. 14).

외관상으로는 열심히 일하고 활동하지만 회심의 경험이 없는 신앙, 진정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건조한 신앙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이 진정으로 변화되지 못하면 입술로 공언하는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 되고 만다.


⑤ 형식주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의가 없는 신앙이다

“성소의 장식은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지 않은 사람은 모두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5권, p. 81).

“다섯 사람의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성경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날마다 그들은 짜여진 의식과 외적인 의무를 준행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봉사는 생명이 없고 그리스도의 의가 결핍되어 있었다. 의의 태양이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비추지 않았다”(Review and Herald, 1894. 3. 27).

그리스도의 의가 없는 신앙이야말로 참으로 무의미한 형식주의 신앙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성소의 장식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지 않은 사람은 마지막 환란 날에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구원의 기초와 뿌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행위에 기초한 자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이 헛됨 것임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엘렌 G. 화잇은 형식주의 신앙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주의 신앙으로 만족해 버리는 교인은 우로가 내리지 않은 길보아산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우로가 결여된 메마른 심령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형식주의 신앙에 만족해버리는 자는 구원과 거리가 먼 아무 가치가 없는 신앙 행위에 불과한 것이며, 스스로 자기 기만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자신을 깊이 살펴보자. 혹시 내 자신이 이러한 형식주의 신앙에 빠져 자기만족과 자기기만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며, 내면적인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논제가 정립되지 않고 체험되지 않으면 신앙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2) 예수님은 거듭남의 중요성을 어떻게 강조하셨는가?


니고데모는 유대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그 나라의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부자요 유식하고 명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별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외형적으로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인간적인 잣대로 평가해 볼 때 그는 훌륭한 신자였다.

어느 날 저녁 고요한 시간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거하시는 처소에 아무도 모르게 찾아갔다. 그는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인하고 싶었고 진리에 대하여 토론하고 싶었다. 마음을 읽으시는 예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가?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임을 가르쳐 주신 말씀인 것이다. 마음속에 건설되는 하나님의 나라(눅 17:20, 21)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 거듭남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결국 거듭나지 못한 자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 즉 은혜의 천국을 건설할 수가 없고, 영광의 천국인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거듭나지 못한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을 체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영적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거듭남이다”(교회증언 9권, p. 23).

“구원을 받기 위하여 우리는 진정한 회심의 의미를 체험으로 알아야만 한다”(Review and Herald, 1904. 7. 7).

형식주의 신앙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 거듭남의 신앙이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형식주의 신앙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새로운 생애로 나아가는 삶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기쁨을 이 땅에서도 맛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거듭나는 경험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거듭남의 경험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필수 요건이다.


2.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들


거듭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육체적인 심장은 온 몸에 피를 공급해 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정신적인 심장으로 부르는 마음(heart)은, 지성(이지), 사고(생각), 상상, 기억, 이성, 양심, 의지, 감정, 정서, 욕망, 충동, 오감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성(이지)은 사물의 도리와 이치를 깨닫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사고(생각)는 어떤 문제나 과제를 해결할 때 생각하고 궁리하는 능력이다.

상상은 육체적인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기억은 오감들의 통로를 통해 입수된 정보들을 저장해 놓은 일종의 정보 저장소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든지, 또는 사단을 위해서 사용되어질 정보들이다.

이성은 본능이나 감성적인 충동에 의하지 않고, 도덕적 개념에 기초하여 의사와 행위를 규제하는 능력으로서, “이 일은 좋은 일이다. 혹은 나쁜 일이다”라고 판단해 주는 힘이다. 즉 상담요원이다.

양심은 사물의 선악을 구별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택하려고 하는 도덕적 판단의 능력으로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호소하는 마음의 힘이다. 이것도 상담요원이다.

의지는 사람의 인성을 지배하는 힘이요, 선택하는 힘이요, 결정하는 힘이요, 행동하는 힘이다. 의지는 마음의 통치자이다. 의지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린다. 의지는 욕망의 소리와 이성과 양심의 소리를 들은 다음 어느 한편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마음의 모든 기능들 가운데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말하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다.

감정은 사건이나 사물 현상에 대하여 느끼고 움직이는 마음의 기분이다. 감정은 정서보다는 가볍게 느끼는 정신적인 반응이다. 예쁜 꽃을 보면 기쁜 감정을 갖는 가벼운 기분, 또는 고요한 천연계에서 느끼는 평온함 같은 기분이다.

정서는 감정보다 더 강하게 느끼는 정신적인 반응이다. 예컨대 넘치는 기쁨, 슬픔, 분노, 사랑, 미움, 공포 등으로, 얼굴이 붉어진다든지, 혹은 창백하게 된다든지, 또는 소름이 끼친다든지, 혹은 눈물이 나온다든지 등등, 강하게 느끼는 정신적인 반응이다.

“그대의 감정, 그대의 감화, 그대의 정서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믿을만한 것들이 못되기 때문이다”(교회증언, 5권, p. 513).

욕망은 무엇을 갖고 싶어 하거나 하고자 하는 강열한 요구이다.

충동은 무엇을 부추기거나 들쑤시거나 하여 어떤 일을 일으키는 힘이다.

오감들은 정보가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다섯 개의 작은 통로들이다. 눈으로 보고(시각), 귀로 듣고(청각), 코로 냄새 맡고(후각), 혀로 맛보고(미각), 손가락과 몸으로 감촉하는(촉각) 감각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오관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이것들을 통하여 승리를 얻을 것이니 이는 이것들이 심령의 통로인 까닭이다”(재림신도의 가정, p. 401).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의 정신적인 요소들이 매우 복잡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어느 날 영희는 숲속을 걸어가다가 오랑캐꽃이 많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영희는 그 꽃을 꺾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영희는 그 꽃을 보고 기뻐하며, 자기 손에 꽃을 들고 그 향기를 맡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영희는 그 꽃을 꺾었다.

그 후 어느 날 영희는 어떤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때 주택가의 잔디밭에 피어 있는 예쁜 꽃이 시선을 끌었다. 영희가 처음으로 오랑캐꽃을 보았을 때 일어났던 감정과 욕망이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 꽃을 꺾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영희는 행동하기 전에 항상 두 번씩 생각하는 침착한 아이였다. 영희의 욕망과 감정은 “그 꽃을 꺾어”하고 요구했다. 즉시 영희의 의지는 마음속에 있는 상담실 요원들의 조언을 듣는다. 이성은 “그것은 개인 재산이야, 만일 네가 그 꽃을 꺾는다면 경찰에 붙잡혀 가게 돼”라고 말했다. 양심은 “어떤 사람에게 속한 것을 가진다는 것은 나쁜 일이야. 즉 그것은 도둑질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 영희의 의지는 그때 꽃을 꺾지 않기로 선택하고 결정한 다음 마음의 생각과 상상과 욕망에게 “안 돼”하고 말했다. 영희의 생각은 그 꽃과 같은 꽃을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영희의 마음은 화원에서 그 꽃을 구입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성은, “좋은 생각이야”라고 말했다. 양심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아”하고 말했다. 의지는 “좋아, 그렇게 하자”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영희는 화원으로 가서 조금 전에 본 것과 같은 꽃을 사 가지고 자기 집 뜰에 심어 놓았다.

이 경험은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언제나 이성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이 되어 있는 의지를 가진 사람의 마음이 작용하는 방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이 강한 의지, 즉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간 의지가 일하는 방법인 것이다.


3. 거듭남의 의미


거듭남의 용어와 같은 의미를 가진 동의어(同意語)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거듭남(the new birth, the second birth), 중생(regeneration), 회심(conversion), 개심(conversion) 등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용어들이 자주 번갈아 가며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표현된 용어는 다르지만 경험은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1) 거듭나기 전의 마음은 어떠한가?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 17:9)이 되고 말았다.

부패된 지성(이지)과 사고(생각)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신령한 진리와 사물을 깨닫지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아 알 수도 없으며, 구원의 이치와 도리를 알지 못한다. 신령한 사물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부패된 욕망과 충동과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사물을 추구하지도 않고, 거룩한 사물을 좋아하지도 못한다. 거룩한 사물에 대한 흥미나 취미가 없다. 그의 모든 취향은 한결 같이 세속적이다. 신령한 세계의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느껴 보지 못한다.

부패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을 따라 자기중심적인 선택과 결정과 행동으로 나아간다. 내 마음 내고집대로 마음껏 행하며 살아간다. 방종의 길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그의 의지는 육신의 욕망의 지배아래 놓여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의지력은 너무 연약해져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다.

“본성적으로 인간의 마음은 악하다. 누가 더러운 것 가운데서 깨끗한 것을 낼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어떤 인간의 발명품이라도 죄 지은 영혼을 위한 치료제를 발견할 수 없다”(시대의 소망, p. 172).


(2) 거듭난 후의 마음은 어떠한가?


부패된 지성(이지)과 사고(생각)와 이성과 양심이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될 때 새롭게 변화된다. 어떻게 변화되는가? 영적 사물을 올바르게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게 되고,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며, 무엇이 바른 길인지를 알게 된다.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게 된다. 사물을 바르게 분별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부패된 욕망과 충동과 감정과 정서가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될 때에 새롭게 변화된다. 어떻게 변화되는가? 과거에 좋아하던 것은 미워하게 되고, 과거에 싫어하던 것은 좋아하게 된다. 세속적인 것보다는 거룩한 사물을 더 좋아하게 된다. 세속적인 독서보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 된다. 취미와 애정의 방향이 완전히 변화된다.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은 마음의 모든 정신적 기능들이 거룩한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부패된 의지가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될 때 새롭게 변화된다. 어떻게 변화되는가? 이제는 자기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된다. 과거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행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결정하며, 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된다.

거듭나기 전 인간의 마음은 부패된 마음이다(렘 17:9). 그러므로 부패된 마음의 모든 요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거듭날 때 “본성의 변화”(시대의 소망, p. 172) 즉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서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져다 준다”(상게서, p. 324).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남이요, 새로 태어난 새 마음이다(겔 36:26, 27). 거듭난 후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 인간의 본성은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절제생활, p. 113) 마음의 모든 요소들이 바른 방향으로 작동하게 된다.

“중생은 사람을 보통 세속적인 감정, 사고, 의지의 방향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치시키고, 하나님의 견지(見地)로 돌아오게 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사물을 보게 하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처럼 판단하게 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게 하는 결과를 맺는 전인적 혁명이다”(기독교서회 刊, 1960, 기독교대사전, p. 825).

바울은 중생의 경험을 개인 속에서 일어나는 전적인 마음의 변화에 비유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롬 12:2)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바울이 ‘변화를 받아’의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한 단어는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인데, 변태나 변성(變性)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에서 온 것이다. 변성은 추하고 동작이 느린 애벌레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는 저 신비한 과정이다. 그것은 너무 급진적이고 본질적이어서 사람이 좀 더 분별력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는 한 그것이 동일한 생명체였음을 깨닫기 어려운 그런 변화를 의미한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위하여 해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조지 R 나이트, 21세기의 성화와 완전, pp. 96, 97).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낡은 생애를 수정해 내거나 또는 개량한 것이 아니라 본성의 변화이다”(시대의 소망, p. 172).


(3) 거듭남의 의미는 무엇인가?


거듭남이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남이란 마음의 방향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거듭남이란 자아중심의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바뀌는 전환점(turning point)이다. 거듭남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시발점(starting point)이다. 거듭남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다. 죄된 옛 생애, 옛 습관, 옛 성질, 죄된 과거의 생애를 청산하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 주님과 연합하여 새로운 생애, 의로운 생애를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성화의 시작이요, 성화의 과정 속에 매일 필요한 경험이다. 거듭남은 다시 태어남이요, 성화는 계속해서 자라남이다. 거듭남은 새로운 마음을 가진 피조물로 창조되는 것이요, 성화는 거듭남을 계속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거룩함을 향해 성장하는 것이다. 거듭남의 경험은 급진적일 수도 있고, 점진적일 수도 있다.


4. 거듭남을 체험하는 과정


거듭나는 일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역사로 이루어지는 신비스러운 영적경험이다. 인간은 그 신비스러운 영적경험을 다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거듭남을 체험하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심어질 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성경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마음에 말씀하시고, 진리를 그 마음에 감명시키신다”(시대의 소망, p. 671).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진리를 그 마음에 감명시키실 때 거듭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신령한 씨앗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마음 밭에 심어질 때 새로운 마음이 싹트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을 가진 피조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기록된 성경의 문자만으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 그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거듭나게 된다.

“진실로 빛과 지식을 주는 것은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의 문자가 아니요 그 말씀을 성령에 의하여 이해하고 마음에 적용시키는 것이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p. 65).

우리가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명상하고, 적용시키는 동안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심령 속에 역사하실 때만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연구할 때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는 문자나 성경 지식에만 의존하지 말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내맡기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자세이다.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깊이 심어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히 4:12)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2)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할 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깨닫게 될 때에 그 사랑이 나의 심령을 울려주고 감동시켜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지만, 특별히 결정적으로 나타난 곳이 갈바리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 큰 희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때 마음속에 감격과 감동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통회케 하며 마음을 변화시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만사에 순서가 있듯이 신앙에도 순서가 있다. 영적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몸소 체험하는 것이다. 억지로 회개하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연구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체험하라. 이것이 이루어지면 회개와 자복, 전적인 헌신, 거듭남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공식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먼저 보여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회개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헌신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먼저 보여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거듭남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으로 동기를 유발시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회개와 자복이 일어나고, 헌신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며,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복할 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진정한 회개와 자복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인해 슬프게 생각하면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나 같은 죄인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에 감격과 감동으로 죄를 회개하며 자복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까지 버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십자가에 나타난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그 사랑이 우리의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며 통회하는 심령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선물을 주시려고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할 때에 죄를 슬퍼하는 통회와 더불어 죄로 얼룩진 심령이 정결하게 되기를 열망하면서 새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게 된다.

이것이 범죄한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했을 때 탄원한 기도의 내용이었다. 다윗은 다음의 두 가지를 간절하게 구하였다. 첫째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 보다 희리이다”(시 51:7). 둘째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진정한 회개에는 죄의 씻음과 더불어 정결하게 된 새 마음, 곧 거듭난 마음을 주시기를 탄원하게 된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새롭게 되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 때에 회개의 경험과 더불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신다.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 바로 이것이 거듭남의 경험이다.


(4) 우리의 마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칠 때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바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을 깨닫게 될 때에 나의 마음과 삶 전체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 충동과 열망이 솟구치게 된다. 이러한 자발적인 헌신은 강요에 의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체험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래서 기꺼이 자원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자원하여 드리는 헌신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삶 전체를 전폭적으로 바쳐버린다. 이제는 자기가 삶을 주관하지 않고 전적인 굴복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지배하시며 주관하시도록 맡겨버린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귀하고 소중한 독생자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우리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그분께 기꺼이 바치고 싶은 거룩한 충동이 솟구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역사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거듭난 마음을 가진 자는 그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제는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나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굳게 결심하게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바치는 자발적인 헌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체험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이러한 헌신이 이루어질 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은 새롭게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5) 우리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굴복할 때에 새로운 능력이 새 마음을 점령한다. 사람이 스스로 성취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인간의 본성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져다주는 것은 초자연적인 역사이다”(시대의 소망, p. 324).

“그대가 그대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에 복종시킬 때 그분은 즉시 그대를 취하여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행하도록 그대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대의 본성은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대의 생각까지도 그분께 복종케 된다”(절제생활, p. 113).

마음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이다. 왜냐하면 의지는 사람의 인성을 지배하는 힘이요, 선택하는 힘이며, 결정하는 힘이요, 순종과 불순종을 좌우하는 최고의 힘이기 때문이다. 의지는 마음의 통치자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러한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매우 존중하신다. “구속 사업에는 강제가 없다. 외부 압력이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성령의 감화 아래서 누구를 섬길지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져 있다”(시대의 소망, p. 367).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결코 강제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재하실 수도 없고 역사하실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에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자아의 무력함을 시인하면서, 자아를 부정하고, 자신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에,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재하셔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시는 것이다.


5. 거듭난 증거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질문하는 것은 자신이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듭난 증거는 무엇인가?


(1) 마음과 행위와 습관에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가 변화된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시대의 소망, p. 173).

“변화는 우리의 품성과 습관과 우리의 직업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정로의 계단, p. 57).

“이전의 본성, 곧 혈육으로 나고 육신에 속한 의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낡은 방법들, 유전적인 성향들, 이전의 습관들은 버려야 한다.--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취미와 새로운 성향들을 갖는데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애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다.--진정한 회심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유전적이거나 습관적으로 배양된 경향들을 변화시킨다”(마라나타, p. 237).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새로운 생각, 새로운 애정, 새로운 관심과 취미, 새로운 목적, 새로운 뜻을 갖게 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등 지금까지 그리스도보다 더 좋아했던 것들은 버리게 되고, 그리스도는 그의 생애의 최고의 매력과 기쁨이 된다. 과거에 사랑하던 것들은 이제 미워하게 되고, 과거에 미워하던 것들은 이제 사랑하게 된다. 교만하고 자기주장만 세우던 자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된다. 허영심이 많고 거만하던 자가 침착하게 되고 근신하게 된다. 음주하던 자가 절제하며 방탕하던 자가 깨끗하게 된다. 세상의 허영된 습관과 유행은 버리게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명상하는 일에 거룩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어 신령한 사물을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지식과 취미와 애정과 관심과 행위와 습관의 방향이 거룩한 쪽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은 얼굴이 잘 생기거나 미인의 모습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다. 거듭난 영혼들은 하나님 앞에 귀하고 소중하며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거듭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그들의 취미가 현저하게 바뀌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거듭난 영혼의 공통점은 신령한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명상할 때 신령한 기쁨을 체험하는 것이다. 거듭난 증거는 마음과 행위와 취미와 습관에 현저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2) 거듭난 마음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즐겨 순종하게 된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아무리 공언할지라도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아니할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신의 품성을 나눠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의의 표준 즉 그의 거룩한 율법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pp. 313, 314).

“여기에 참된 증거가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의 감정과 사상과 목적과 행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p. 61).

거듭난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고 일치한다. 곧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새롭게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된다. 왜 그런가? 거듭난 마음에는,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8:10)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새 언약이 성취된다.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 율법의 정신 곧 사랑, 거룩함, 공의, 자비, 진실함, 의로움이 그 마음속에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거듭난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성품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기 때문에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요일 5:3)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이것이 거듭난 증거이다.


(3) 그리스도를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


“누가 마음을 지배하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가? 우리의 가장 열정적인 애정과 우리의 최대의 정력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있을 것이요 그를 생각하는 일이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의 몸을 다 그에게 바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형상을 입고, 그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의 뜻을 행하여,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상게서 p. 58).

거듭난 자의 특징은 마음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거듭나기 전의 마음의 주인은 자아와 사단과 세상이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를 그의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 그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거듭난 마음에는 예수님이 가장 큰 매력과 기쁨과 소망이 되신다. 그분의 놀라운 희생에 대한 감사의 정신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의 대화의 주제와 노래의 주제는 그리스도가 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을 볼 때마다 자신도 그처럼 아름다운 성품을 닮고 싶은 강열한 열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고, 그분의 성품을 반사하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 자가 부르는 노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직 주만 높임을 받으시고

오직 주만 내 앞에 계시고

오직 주만 내 모든 행동 속에

오직 주만 내 모든 생각에”

(찬미가, 450장)


6. 거듭남을 유지하는 방법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경험 중의 하나는 거듭남이다.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요 3:3, 5).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는 한 번 거듭난 후에 어떻게 그 거듭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거듭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1) 날마다 거듭남을 체험하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이란 일평생을 통하여 단 한 번의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는 거듭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거듭남을 유지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거듭남, 즉 회심의 경험은 일생을 통하여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족한 것인가? 다음의 영감적인 진술을 깊이 음미해 보자.

“진정한 회심이 필요하다. 수년 동안에 단 한 번이 아니라 매일의 회심이 필요하다. 회심은 사람을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해준다. 옛 것들, 즉 그의 육정과 악에 기울어지는 유전적이고 후천적으로 배양된 성향은 사라진다. 그는 새로워지고 성화된다. 그러나 이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단이 존재하는 한, 그는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애쓰는 자는 악의 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우리의 높은 부르심, p. 215).

거듭남은 단 한 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필요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날마다 사단은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일 거듭남으로 새로운 마음을 받아 사단이 제공하는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님의 성품으로 자라나 아름다운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한 말의 뜻이 무엇인가? 옛 자아, 곧 죄된 과거의 마음과 행실과 습관들을 날마다 죽게 한 것은, 날마다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기 위해서이다. 날마다 자신을 죽게 한 것은, 날마다 새로 태어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심의 경험은 평생 동안 단 한 번의 경험이 아니라 매일 필요한 경험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지속적으로 거듭남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최초의 거듭남의 과정을 따라 날마다 거듭남을 체험하는 것이다. 날마다 거듭남을 체험하는 것이 거듭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2) 날마다 말씀의 소금을 마음에 적용하라


“비록 새롭게 된 심령이라 할지라도 매일 말씀의 소금을 적용하지 않으면 그 아름다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가 없다. 매일 하늘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아무도 회심한 상태를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Review and Herald, 1897. 9. 14; 마지막 날 사건들, p. 66).

매일 말씀의 소금을 적용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명상하며 마음에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왜 그것이 필요한가? 거듭남이란 완전히 성숙한 단계가 아니라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아기와 같다. 어린 아기가 자라는 데는 영양분이 가득한 젖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처럼,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유지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거듭남은 새로 태어남이요, 성화는 계속 거듭남을 유지하면서 계속 자라나는 과정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새로 태어난 아기와 같이, 새로 태어난 마음은 매일 말씀의 소금을 마음에 적용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날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아무도 그 아름다운 회심의 상태를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최초의 거듭남을 체험한 자들이 그 회심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고 실패한 이유는, 매일 말씀의 소금을 마음에 적용하는 일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활력소를 공급받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지도를 구하면서, 말씀을 읽고 연구하면서, 마음속에 와 닿는 하나님의 음성을 명상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때 내 마음 속에 적용된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영적 양분과 수액이 되어 나의 영적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자라서 열매를 맺도록 해 주는 생명의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적인 에너지를 공급받기 위하여 날마다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날마다 말씀을 먹는 것이 거듭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방법 중의 하나임을 명심하자.


(3)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명상하라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우리가 죄의 유혹을 이기고, 죄의 소욕을 이기게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비록 이론적으로 구원의 이치와 도리에 정통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우리 신앙생활에 능력이나 활력이 모자랄 것이며, 거듭남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 것이며, 선을 행하는 일에 피곤하고 낙심하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의 원동력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고 체험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신앙의 기초석이다.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어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고 싶어진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준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면 더 이상 묻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게 된다. 구원받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난 후 하나님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순종하도록 이끄시기 때문에 안식일을 기쁜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는 우리를 순종하도록 이끄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으며, 끝내는 순교장에서도 찬미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거룩한 정열이 부족한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할 만큼 깨닫지 못하는데 있으며, 체험해야할 만큼 체험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형식주의 신앙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고 체험하도록 성령의 지도하심 아래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 번이라도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성령께 간구해야 한다. 아무리 육신의 소욕이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한 사람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쉬워지게 된다. 날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 우리의 마음에 활력을 얻고, 거듭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될 것이다.


(4)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 5).

필자는 손수 포도밭을 조성하고, 포도나무를 여러 해 동안 재배해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신 포도나무의 비유를 잘 이해하게 되었다. 포도는 해마다 새로 나온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본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수액과 양분을 공급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가지는 말라 죽고 만다. 우리의 영적 생명도 이와 꼭 같다.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때때로 강한 바람에 꺾여서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금방 말라죽고 만다. 때로는 거의 열매가 다 자라서 숙성단계에 이르렀을지라도 강한 바람에 시달려 꺾어져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열매마저 시들어 쓸모없는 죽은 가지가 되고 만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바람에 시달려도 끝까지 본체에 붙어있는 가지는 탐스러운 열매, 완숙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 사단이 아무리 맹렬하게 유혹하고 공격해올지라도 우리의 본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면 우리의 영적생명은 끝까지 유지되고, 그분으로부터 날마다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으므로 새로운 회심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며, 성화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첫째로,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양식과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것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육체적 존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영적, 정신적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마 4:4)고 말씀하신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애와 아름다운 성품을 바라보고, 흠모하며, 배우고, 모방하여, 내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함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의 성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때에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 안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곧 그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실물교훈, p. 312).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 곧 성화된 성품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와 늘 동행하는 것이다. 집에서나, 식탁에서나, 골방에서나, 밭에서나, 일을 할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언제든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마음의 묵상과 기도로 주님과 사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멀리 계신 주님이 아니라 항상 내 곁에 계신 주님과 교제하게 될 것이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주님께 아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통하여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거듭남은 지속적으로 유지 될 수 있다.


(5) 날마다 성령을 좇아 바르게 선택하라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거듭남을 유지하며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비결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매일의 생애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거듭나고 하나님의 영을 좇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육신이 여전히 영과 대적하여 싸우는 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회심하여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갈 때, 우리가 가진 육체에서 분리되어 더 이상 시험이 없거나 갈등과 투쟁이 없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투쟁하는 삶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비록 마음이 거듭났을지라도 육체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소욕과 욕망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이럴 때마다 성령을 좇아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비록 거듭났다 할지라도 만일 육신의 소욕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를 지배하던 죄된 성질들이 다시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우리의 의지를 굴복시킨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육신의 소욕과 욕망은 무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거듭나던 순간에 자신을 바치던 헌신을 늘 기억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매일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며, 매 순간 성령을 좇아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가 방심하여 믿음의 눈을 그리스도에게서 돌리는 순간 우리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의 경험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물 위로 걸을 때에 처음에 그는 예수님께만 눈을 고정시켰다. 아무리 험한 파도가 일어나고 물결이 밀어 닥쳐도 그는 예수님만 바라봄으로 무서움도 잊은 채 놀랍게도 물 위를 예수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쭐한 생각에 빠져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고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시야에서 놓쳤을 때, 그는 깊은 바닷물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도 이와 같다.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며, 항상 성령께서 나를 지배하시고 주관하시도록 의지를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 바르게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본장에서 우리는 “거듭남을 체험하라”는 주제를 연구해 왔다. 거듭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각자가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서 거듭남의 경험이 내 자신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검증해보아야 하겠다. 최초의 거듭남의 경험을 이미 한 자들은 날마다 거듭나는 경험을 통하여 거듭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해야 하겠다. 아직도 거듭남의 경험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놀라운 거듭남의 경험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겠다.

한 개인의 구원의 경험에 있어서 거듭남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필수적인 과정이다.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은 얼마나 뜻이 깊은 말씀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 2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우리 마음속에 건설되는 나라임을 결코 간과하지 말자. 우리 마음속에 건설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남으로 시작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면 먹는 것과 마시는 데서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의를 사랑하게 되고, 하늘의 화평을 맛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고 흔들 수 없는 하늘의 거룩한 기쁨을 체험하는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의와 화평과 기쁨이 넘치는 마음의 천국이 건설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천국을 이룬 자는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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