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경험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은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체험하는 것이다. 지적인 깨달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먼저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체험할 때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나의 적나라한 모습은 어떠한가?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인간은 어떠한 존재가 되고 말았는가?
1.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그러면 참으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무엇에 근거하여 알 수 있는가?
(1)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존재라고 증거하고 있는가?
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첫째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둘째로,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셋째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바울이라는 인간 기자를 통하여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② 인간은 부패한 마음을 가진 존재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입지 못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은 마치 강가에 심어진 열매 맺는 나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매 마른 사막의 떨기나무가 되기를(렘 17:6-8)) 선택하는 비참한 이유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 이유는 아담의 범죄 후 인간의 본성은 타락한 본성 즉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the tendency to sin)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어린 시절부터 선한 것 보다는 악한 것을 더 빨리 배우고 습득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죄악된 것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③ 인간은 악한 생각을 가진 존재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2, 23).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으며 죄악 됨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폭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비참하고 절망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④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일 뿐이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엡 2: 4)시지 않으셨다면 참으로 모든 인간은 절망적인 죄인일 뿐이다.
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 12).
범죄와 타락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그리스도 없이 사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참으로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죄인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⑥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전에는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친히 대화를 나누면서 즐겁게 교제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한 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 설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또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 감히 설 수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도 없는 죄인들이 되고 말았다. 그 누가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사회가 규정하는 법으로는 죄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그 누가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증거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어째서 제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까? 나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정직한 사람인데 어째서 제가 죄인이란 말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양심의 소리를 따라 선하게 살아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억울한 판정입니다”라고 항변하고 싶은가? 다음의 질문들과 답변들을 깊이 음미해 보면서 그 대답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보도록 하자.
(2)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근거는 무엇인가?
① 죄의 보편성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 8:46).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9).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전 7:20).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이상에 열거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한 마디로 죄의 보편성을 보여주고 있다. 눈을 돌려 지구촌 곳곳, 구석구석을 살펴보라. 도처에 죄가 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탈을 쓰고 마귀의 행동을 저지르는 사악하고 광포하며 끔직스러운 살인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각가지 형태의 죄악들이 도처에 편만해 있음을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인간의 역사가 있는 곳에 항상 죄가 있어 왔다”고 한 혹자의 말이야말로 죄의 보편성을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한 말인가? 한마디로 “인간의 역사는 죄의 역사”이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죄를 모르는 사람은 이 땅에 하나도 없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죄를 짓는 방법은 항상 잘 알고 있다. 악이 인간의 심령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마음속으로부터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막 7:21, 22)를 낳고 있지 않은가? 그 누가 이 세상의 죄악상을 부인하겠는가? 도처에 편만한 죄의 보편성은 곧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입증해 주는 근거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② 사망의 보편성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그들에게 내려진 최종적인 선고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사망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죄와 사망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불멸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망은 죄의 결과로서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의 문을 연 최초의 장본인은 아담과 하와이다. 이 지구성에서 죄와 사망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하여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편만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된 것이다.
하늘로 승천한 에녹과 엘리야를 제외하고서, 이 땅에 태어난 자들 중에 사망의 선고를 피한 자가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치던 무신론자들도 정해진 때가 되면 바람에 시들어 버린 풀잎처럼 사라지고 만다. 온 세상을 호령하던 영웅들도 때가 되면 인생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이제 그 누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들을 알아주겠는가?
범죄한 인생이 걸어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닌가?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덤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영어로 상대방에게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을 때, How old are you?라고 표현한다. 이 뜻이 무엇인가? “당신은 얼마나 늙었느냐?”라는 뜻이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에게 “너는 몇 살이지?”하고 물으면, 그 아이는 “I am three years old.”라고 대답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삼년이나 늙었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 대답이 정답이다. 이제 그 어린아이는 죽음의 무덤을 향해 삼 년 간을 걸어온 것이 아닌가?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지구성은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들을 매장시키는 공동묘지가 되어버렸다. 이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사망의 권세 아래 모든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 지구촌 곳곳을 살펴보라. 도처에 사망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으며 죽음의 탄식과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지 않는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가고 있지 않는가? 질병, 재난, 사고, 노쇠, 자살, 타살, 테러, 전쟁 등등으로 도처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처럼 도처에 편만한 사망의 보편성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입증하는 근거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3)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은 무엇을 증거하는가?
① 죄를 범한 양심의 죄책감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증거한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생겨난 뚜렷한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하나님이 죄를 범했다고 선고하시기 전에 그들의 양심이 먼저 그들에게 죄인임을 고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심의 소리를 통하여 느껴진 죄책감은 참으로 무섭고 고통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 앞에 철저한 죄인 중의 괴수로서 당하신 죄책감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었다. 성경에는 많은 인물들의 죄책감이 나타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죄책감(창 3:8), 가인의 죄책감(창 4:13,14), 야곱의 죄책감(창 32:11), 요셉의 형들의 죄책감(창 42:21), 사울의 죄책감(삼상 24:17), 다윗의 죄책감(삼하 12:13), 욥의 죄책감(욥 1:12), 베드로의 죄책감(마 26:75), 유다의 죄책감(마 27:3-5), 빌라도의 죄책감(마 27:24), 십자가상의 강도의 죄책감(눅 23:41), 바울의 죄책감(롬 7:19)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죄책감은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음을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죄책감이라는 부정적 감정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이다.
②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은 도피심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증거한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에덴동산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보자. 금단의 과일을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범한 직후에 아담과 하와에게 생겨난 부정적인 감정들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것들 중 하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자 하는 도피심이었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토록 다정하고 자애로우신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를 나누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갑자기 그분의 얼굴을 피하고 싶은 감정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숲속에 숨어 버린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은 도피심은 죄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은 여전히 우리의 감정 속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마음속에 죄를 계속 품고 살아가는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무를 수가 없고 도피할 수밖에 없다.
③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고독감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증거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기쁨을 상실해 버렸다. 하나님과 다정스럽게 교제하던 특권을 상실해 버린 아담과 하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거룩한 천사들과 교제를 나누던 그 즐거움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버렸을 때 마음에 밀려오는 불안과 고독감은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토록 행복하고 즐겁고 평온하던 마음이 갑자기 우울하고 고독함을 느끼게 되었다. 정서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어두운 먹구름이 그들의 마음에 밀려온 것이다.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
왜 사람은 때때로 영혼의 고독을 느끼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고독이 있는 것 같다. 첫 번째의 고독은 기다림의 고독이다. 스무 살 난 처녀가 날마다 거울 앞에 서서 붉어지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내 님은 어디 계실까?”하면서, 사랑의 대상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보지만 나타나지 않을 때, “오, 나는 고독해, 그러나 나는 고독을 사랑해”라고 독백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다림의 고독은 희망적인 고독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고독은 절망적인 고독이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버린 미망인이 있다. 날마다 무덤 앞에 찾아가 통곡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는 남편을 애타게 불러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때 그녀의 마음속에 밀려오는 고독은 분명히 절망적인 고독이다. 세 번째의 고독은 영혼의 고독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자녀를 두고, 사업으로도 크게 성공한 중견 남자가 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가정이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느끼는 순간, 그는 갑자기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그 언젠가는 내 곁에 있던 사랑하는 아내도, 귀여운 자녀도 이 땅에 남겨두고 나 홀로 영원히 떠날 날이 오겠지? 그 순간 그의 영혼은 깊은 인생의 고독을 홀로 느끼게 된다. 이러한 영혼의 고독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고독이다. 바로 이러한 영혼의 고독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영혼 속에 찾아오는 고독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죄인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④ 거룩한 분위기와 조화될 수 없는 정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증거한다
“사람이 죄 없는 상태에 있을 때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골 2:3) 있는 자와 더불어 즐거이 교통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한 이후로는 신성한 것을 즐기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하였다. 지금도 회심하지 아니한 자의 마음은 역시 그러하다. 그 마음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없고 거룩한 자들과 같이 교제하기를 꺼리게 된다. 비록 그가 천국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는 거기서 아무 기쁨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기심이 없는 사랑이 지배하는 거기서, 각자의 마음이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거기서, 죄인의 심금에는 아무런 공명도 없을 것이다. 죄인의 사상과 취미와 동기도 거기 사는 무죄한 자들을 고무시키는 사상과 취미와 동기와는 배치될 것이다. 그는 하늘의 멜로디에는 거칠은 음조가 될 것이다. 그에게는 천국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장소가 될 것이다. 그는 하늘의 빛이 되시고 하늘의 기쁨의 중심이 되시는 자에게서 피하기를 원할 것이다”(정로의 계단, pp. 17, 18).
이처럼 죄인의 정서는 거룩한 하늘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도리어 고통스럽고 피하기를 원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느끼는 부정적인 정서인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성찰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그래도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4)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단정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라. 그리하면 그대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성경을 깊이 읽고 명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히 4:12)여 우리의 모든 추하고 더러운 죄악을 다 드러내 보여주신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악한 동기와 악한 생각이 너는 죄인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사망”이라고 말해 준다. 그런데도 내가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항변하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싶은가?
②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서 보라. 그리하면 그대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기능 중 하나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비쳐주는 “거울”(약 1:23)의 기능이다. 율법의 거울 앞에 서서 그 거울에 비쳐진 마음의 상태를 살펴보라. 나의 동기와 생각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거울 속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깨끗한 모습인가? 아니면 죄로 얼룩진 죄인의 모습인가? “너는 하나님 앞에 죄로 얼룩진 죄인이라”고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은 단지 외적인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동기까지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동기로 죄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지금까지 일생을 살아오면서 나의 외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동기를 하나님의 율법의 거울에 비쳐볼 때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참으로 깨끗한 모습인가? 아니면 추하고 더러운 죄인의 모습인가?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하나님의 자비를 탄원하고 싶지 않은가? 율법은 나의 죄의 문제가 심각함으로 빨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서 죄사함을 받고 용서의 은혜를 입으라고 나에게 말해 준다.
③ 갈바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쳐다보라. 그리하면 그대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나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나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고통과 죽으심을 당하신 것이라고 나에게 말해 준다. 바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자. 그리고 믿음의 손을 뻗쳐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마음의 문설주에 바르자. 구세주 되신 그리스도께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자. 죄사함을 받고 양심의 죄책감에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자.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맛보자.
십자가 앞에 서 보지 않은 자는 자신이 누추한 죄인임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갈바리 십자가는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누추한 죄인임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속죄소임을 잊지 말자.
④ 모든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라. 그리하면 그대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신학을 공부하던 학생시절 서울 홍제동 화장터를 견학했던 그때의 기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곳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마음 저리게 느꼈던 기억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절감하면서 로마서 5장 12절의 말씀이 강렬하게 마음에 와 닿는 경험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필자는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왜 모든 사람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것일까”라고. 그 때 성경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강렬한 불꽃으로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것이 살았을 때 나와 같은 사람이었던가? 그렇다면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되고 말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죽음의 외적 형태는 다를지라도 모든 사람은 동일한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죽음의 운명을 안고 무덤을 향해 홀로 걸어가는 외로운 나그네 길이 아닐까?” 이것이 필자가 그때 자신과 나누던 영혼의 대화였다.
러시아의 철인 톨스토이는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을 해준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올 때마다 추운 겨울을 위해 사람들은 열심히 준비하건만 어째서 자신의 인생의 겨울을 위해서는 그토록도 준비하지 않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볼 때 나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참으로 이 땅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의 죽음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며, 날마다 죽음의 순간을 위해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사망의 선고를 받고 운명의 날을 앞에 두고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고마운 조언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은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분명하게 입증하는 근거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았다. 결론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바로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 그러면 우리 모두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다는 말인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는 누가 필요한 것인가?
2.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죄인이 되어버린 모든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 되는 것은 무엇일까? 죄인에게는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부터는 어째서 죄인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가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고자 한다.
(1) 왜 죄인에게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①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죄의 본질은 어떠한 것인가?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정신이다. 곧 “죄의 뿌리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반역적인 자기추구의 의지 (self-seeking will)에 있는 것이다”(한스 K. 라론델,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p. 35). 루스벨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반역적인 자기추구의 의지가 결국 그를 타락하게 만들었다. 뱀의 입을 통하여 타락한 루스벨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열망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근본적으로 반역적인 자기추구의 의지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배치되는 정신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곧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과 배치되는 정신을 가질 때, 그것이 생각과 동기와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비록 그러한 정신이 외적 행위로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생각과 동기로 동의하고 선택했다면 이미 그는 죄를 범한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인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 되고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하나님의 말씀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 9). 이 부패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2, 23). 그래서 범죄한 인간의 상태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엡 2: 3)을 마음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상태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엡 2: 3)가 된 상태이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 속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아무런 공로와 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영원히 사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므로 죄인에게는 죄의 세력과 영원한 사망에서 구출해줄 수 있는 구세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 구세주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속죄할 수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와 능력만이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의롭게 해주심으로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의롭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은 구세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성취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의로움과 선함에 만족해 버리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조차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너무도 단단한 돌밭이다. 도덕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는 사람의 큰 문제들 중의 하나는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누추한 죄인이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성서적인 관점에서 가장 절망적인 죄인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정직한 사람이다. 바리새인의 경우에서처럼 자신의 의로움과 선함을 과시하고 타인을 멸시하는 죄보다 더 기만적인 것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봉사하시는 동안 가장 개심시키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함으로 회심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기만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20).
“예수님께서는, ‘부자라 부요하여’(계 3:17)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축복의 잔을 내미셨다. 그러나 그들은 조소로써 그 은혜의 선물을 외면하였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자신이 꽤 선량한 줄로 생각하고 현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에 참예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만은 아무 필요를 느끼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와 또 그분께서 오셔서 주시고자 하신 무한한 축복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위한 자리가 없다. 스스로를 부요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여기는 자들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산상보훈, p. 7).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죄인인데도 자신의 가련한 영적 상태를 깨닫지 못함으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절망적인 죄인이 아닐 수 없다. 죄에 대한 불감증으로 마비되어 버린 양심처럼 절망적인 것은 없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나는 너보다 더 의롭고, 거룩하며, 선하며, 더 많은 신앙적 성취를 이룬 자”라고 자화자찬하는 현대판 바리새인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②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아버지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생명과 지혜와 기쁨의 근원이시다”(정로의 계단, p. 9). 생명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범죄로 말미암아 죄인은 그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죄인 스스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도 없고 그 무엇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서만 죄인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성경에 나타난 다음의 상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성경에 나타난 하나의 상징을 잘 이해하면 구원의 도리와 이치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야곱은 자기 형을 속여서 기만적인 방법으로 장자권을 탈취하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형 에서는 분노한다. 히브리 민족에게 있어서 장자권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야곱은 집을 빠져나와 도망치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간교한 기만죄를 범한 것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괴로워한다. 그는 외로운 방랑자의 신세로 도망치면서,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할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어느새 밤이 되어 그는 돌을 베개로 삼고 차디찬 땅바닥에서 잠이 든다. 꿈속에 하나의 사다리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지상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였다. 그 사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상징으로 보여준 그 사다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지상에서 하늘까지 연결된 그 사다리는 바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인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직 죄인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그러므로 죄인에게는 구세주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③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법적 관점에서 볼 때, 죄를 범한 자에게 법은 반드시 심판과 형벌을 요구한다. 살인죄를 범한 자에게 무기징역, 또는 사형을 요구한다. 이 공의의 요구는 범죄한 장본인이 형벌을 받음으로 죄의 문제는 해결된다. 이것이 사법적 관점에서 죄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다.
“만약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속죄의 보혈 없이도 성취될 수 있다면, 법적인 죄의 차원에서 죄는 죄로 다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정당화되고 또 영원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와 함께 공존하실 수 없다(합 1:13). 그의 공의는 죄가 심판으로 옮겨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와 죄인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셔야 한다. 이 선고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의 자리인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다. 이 속죄는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 아래 섰기 때문에 필요했다.--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하나님의 공의를 합당하게 만족시켰고, 또 하나님은 인간이 죽는 것 대신에 그리스도의 자아희생을 기꺼이 받아 주신다”(한스 K. 라론델,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p. 38).
범죄하고 타락한 장본인은 인간인데, 인간이 그 형벌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고전 15:3)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의 구세주가 되신다. 바로 나의 구주가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속죄와 용서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사망에서 면죄를 받게 된다.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러운 은혜인가?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감동과 감격이 일어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를 감격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자.
④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죄의 권세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계 1:5)시켜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죄의 권세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세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는 자가 너무나 적다는 것을 아셨을 때,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당하셨다.
“이제 영광의 주께서는 인류를 위한 대속물로서 운명하고 계셨다. 그분의 귀중한 생명을 거두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기쁨으로 들뜨지 않으셨다. 모든 것은 숨이 막힐 듯이 침울했다. 그분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분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자아내게 한 것은 십자가의 고통과 치욕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당한 자 중에 제 일인자이셨으나 그분의 고통은 죄의 유해성을 느끼는 데서 오는 고통, 인간이 죄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죄의 흉악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는 데서 오는 고통이었다.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너무나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과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나오려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아셨다”(시대의 소망, p. 752).
죄의 세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그리스도께서는 전율하시면서 강렬하게 느끼셨다. 이러한 죄의 권세에서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죄의 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죄에서 자유를 얻도록 해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 구세주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의 무서운 세력과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세주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켜주시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싶지 않은가?
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상태와 신분이 어떠한 것이지를 선행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범죄하기 전의 인간의 상태와 신분은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였으며, 하나님과 친구의 관계였으며, 거룩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이러한 관계는 깨어져 버렸다.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고(롬 5:12),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롬 5: 10),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어 버렸다(엡 2:3).
“화목”이란 용어는 “불화”의 관계를 전제로 한 용어이다.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 또는 불목의 관계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만 것이다. 그 결과는 영원한 사망이었다. 거룩한 사랑의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은 인간의 멸망을 허용하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범죄한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과 화목제물로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은 인간의 착상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권적인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불화와 이간의 원인 제공은 인간 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와 화목을 위한 주도권을 행사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아무런 공로나 의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화목을 이루는 기초는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에 근거한 것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롬 5:10)을 이루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화목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라는 구절이야말로 그토록 유명한 구절이 아닐 수가 없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롬 3:25)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오묘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탄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 10). 그러므로 하나님은 “화목의 제공자요 또한 수령자이시다”(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T. Theology, vol. 3 (1978), p. 162;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p. 42).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죄에 대한 거룩한 진노를 받도록 그리스도를 인간의 대리자와 대속제물로 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희생을 화목제물로 받으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마 20:28).
왜 죄를 범한 죄인에게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 2). 죄인은 대속제물과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방법이다. 이 거룩한 화목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소중한 칭의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에게는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이란 그리스도와 자신의 영혼을 연합시키므로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탕자는 아버지께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 십자가상에서 화목케 하신 하나님의 객관적인 행위가 자신에게 주관적인 효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 20)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 간절한 하나님의 호소에 그대와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는가?
⑥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만 인간은 죄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이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함을 받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신다. 왜냐하면 죄와 죄인은 죄를 소멸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비록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본성 즉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유전 받았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거듭나고 새 마음으로 변화되었을 때,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게 되고, 그때에 우리의 본성은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위로부터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때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가장 높은 의미의 자유가 있다.--우리 스스로 사단의 지배를 벗어날 힘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크게 필요를 느껴 자신보다 더 높은 힘을 구할 때, 영혼의 힘에는 성령의 거룩한 힘이 불어넣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시대의 소망, p. 466).
“그대가 그대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에 복종시킬 때 그분은 즉시 그대를 취하여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행하도록 그대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대의 본성은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대의 생각까지도 그분께 복종케 된다”(절제생활, p. 129).
“신령한 나라에 들어가기를 결심한 사람은 흑암의 나라의 군대를 배경으로 하는 모든 거듭나지 않은 성질의 힘과 감정이 모두 그대를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날마다 그는 헌신을 새롭게 하고 날마다 악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옛 습관들, 악으로 기울어지는 유전적 경향은 언제나 우세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경계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승리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사도행적, p. 477).
“그리스도를 굳게 신뢰하는 자들은 어떠한 유전적 혹은 후천적 습관이나 경향의 노예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저열한 기질에 얽매이는 대신에 오히려 식욕과 정욕을 지배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유한한 힘만으로 죄악과 싸우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악으로 기울어지는 유전적 혹은 후천적 경향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후히 주시는 능력을 통하여 능히 극복할 수 있다”(절제생활, p. 112).
우리가 지니고 있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유전적 혹은 후천적 경향이 무엇이든지 간에 위로부터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통하여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보증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는 하늘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만 인간은 죄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⑦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소식인가! 그대와 내가 영원히 멸망당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과 영생을 얻기를 간절히 열망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해서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인간은 심히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사람들은 이 땅위에 오래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다른 사람은 병들어 죽어도 나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러나 막상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싶고 구원함을 받고 싶어지는 종교심의 발로는 무엇 때문일까? 역시 인간은 끝내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진 존재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영생이 그리워지는 존재일까? 범죄와 타락으로 에덴을 상실한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그 동산을 한없이 그리워하던 그 향수심이 그의 후손인 우리 모두에게도 유전된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인간은 죄악과 고통과 죽음이 없는 이상향을 찾아 구원과 영생을 갈구하는 종교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종교가 없는 때는 결코 없었다. 그래서 불란서의 한 종교학자가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이다”라고 피력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여러 해 전에 필자는 한 병상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 환자는 한국 원자력 병원의 원장으로 근무하던 탁월한 의사였다. 잠시 인사를 나눈 다음, 그 환자는 자신의 과거의 일생을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영국이 선정한 세계 500인 의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암의 권위자로 명성을 떨치던 탁월한 의사요 의학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천재로 생각했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는 것이다. 평생을 통하여 수많은 암 환자들을 자기 손으로 치료해주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암 병은 고칠 수 없는 의사가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땅에 한 달 밖에 살 수 없는 사형선고자라고 토로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의 손을 붙들고 이렇게 고백하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필자는 성경을 펼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보증된다”는 것을 읽어주면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도록 조용히 호소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였으며 마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그분의 말대로 한 달 후에 그는 영원한 소망을 붙들고 주안에서 잠들게 되었다.
그 때 필자의 마음속에 맴도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영생을 그리워하는 종교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 누가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종교심의 발로는 가장 연약할 때, 임종 직전에 가장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유한된 인간이 느끼는 종교적 갈구이다. 이러한 종교적 갈구를 해결하는 길이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약속인가! 하나님의 귀한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기를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 이것만이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인생의 시간이 다했을 때 우리가 붙들어야할 소망은 무엇일까? 이 땅의 순간적인 것들은 결코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의 소망처럼 가장 가치있고 귀한 것은 결코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2) 죄인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15-21)
여기에 강조된 핵심적인 사상은 무엇인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하고 정죄와 사망이 임하게 되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왕노릇하고 죄인이 의롭게 되며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로마서 5장 15-21절의 내용은 똑 같은 사상이 다른 용어들로 반복해서 표현되고 있다. 한 가지의 사상을 대구법으로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하면서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15절 : 아담은 사망, 그리스도는 은혜
• 16절 : 아담은 정죄, 그리스도는 의롭다 하심
• 17절 : 아담은 사망, 그리스도는 생명
• 18절 : 아담은 정죄, 그리스도는 면죄(의롭다하심)
• 19절 : 아담은 많은 죄인, 그리스도는 많은 의인
• 20절 : 아담은 죄가 더함, 그리스도는 은혜가 더욱 넘침
• 21절 : 아담은 죄가 왕노릇, 그리스도는 은혜가 왕노릇
• 21절 : 결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의 선물
왜 바울이 같은 사상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면서 그토록 힘 있게 강조하고 있는가? 이 내용이 너무나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범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정죄를 받고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의롭게 될 수 있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수인 것이다.
인류의 시조인 첫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정죄와 사망의 함정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그의 모든 후손들도 아담의 범죄의 결과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시고 오심으로 인류의 대속주로서 하나님 앞에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서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전 5:14). 사법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범죄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 간주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감당해야 할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영원한 사망의 대가가 지불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영원한 사망에서 면제되고 해방되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 사상을 거듭 반복하면서 힘 있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두 대표, 즉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고전 15:45) 안에서 정죄와 은혜, 죄의 왕노릇과 은혜의 왕노릇, 사망과 영생을 대비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또 다시 고린도전서 15장에 동일한 사상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여기서도 바울은 대구법을 사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 첫 아담은 산 영(창 2:7),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
• 첫 아담은 육에 있는 자, 마지막 아담은 신령한 자
• 첫 아담은 땅에서 난 자, 마지막 아담은 하늘에서 난 자
• 첫 아담은 흙에 속한 자, 마지막 아담은 하늘에 속한 자
• 흙에 속한 자의 형상,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여기에서 바울이 같은 사상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범죄한 첫 아담은 흙에 속한 자요,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자이다. 그러므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우리도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의지하여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강조된 하나의 핵심적인 사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 아담의 범죄의 결과와 영향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고, 흙에 속한 자가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의롭게 되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바로 핵심적인 사상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강조하는 복음의 진수인 것이다.
그토록 반복하여 강조되는 이 구절들을 읽고 명상할 때마다 우리에게 무엇을 상기시켜 주는가? 마지막 임종을 앞둔 모세가 자기 민족을 애끓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다시는 하나님께 반역하지 말고 그분의 명령을 꼭 순종하라고 간곡히 호소하며 심심히 강조하는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 축복과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그토록 여러 번 반복하면서 목청을 높여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사상이 성경의 핵심적인 복음의 기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의 구원이 되시며, 우리의 희망이 되신다! 범죄한 죄인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의 귀에 반복하여 메아리쳐 들려오는 아름다운 복음의 기별이다.
(3) 이 복음의 기별은 어떤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자에게 기쁜 소식이 된다. 자신의 의로움과 선함을 의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이 기별이 복음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치유가 불가능한 절망적인 죄인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구원이나 회복의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단절시켜 버리는 것이다. 로마서에 나타난 구원론의 초석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롬 3:9, 23)한다는 선언이다. 로마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라는 선언을 전제로 하여 구원의 길이 되신 그리스도께로 죄인을 인도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롬 3:24)어야만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고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철저히 절망해 본 자만이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절감하는가? 그렇다면 희망적인 죄인이다. 구세주 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구하자. 그리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발견하고 체험하자. 그 놀라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하나님의 은혜, 주체할 수 없는 그 큰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며, 감동하고, 용해되어 그분의 무릎 앞에서 통회하자. 그래서 용서받은 죄인이 되자.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굳게 신뢰하자.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굳게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죄인의 신분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로 여겨주신다. 이것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에게 칭의의 선물을 주실 뿐만 아니라 성화의 선물도 주신다.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는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에 성화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칭의와 성화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의 입술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시다!” 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간증했던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영광과 자랑을 땅속에 파묻어버리는 경험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셔야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