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며, 혹 실제 이야기라 해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며, 혹 지금 일어나는 일이라 해도 내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교훈을 뽑아내는 일은 부담이 없습니다. 놀부를 성토하고 흥부를 동정하는 일은 도덕적 카타르시스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이렇게 읽습니다. 성경을 전래동화 읽듯 적절한 시사점과 교훈을 뽑고 깊은 문학적 통찰과 역사적, 학문적 지식을 다뤄내기도 합니다. 삶에 적용도 하지만 크게 자아를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선까지만 하고 자기를 다 포기해야하는 지점까지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언제나 독자의 '현재의 삶'에 깊이 관여합니다. 복음을 접하는 사람을 이야기의 당사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가롭게 교훈을 뽑아내는 구경꾼이 아니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당사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놀부가 바로 너다"
" 그 사람, 네가 방금 무시했던 그 사람이 네 동생 흥부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삶에 관여하는 복음이 아니면 '죽은 복음'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참 복음은 항상 신자의「현재의 삶」에 관여하여 책망하고 징계하고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영원한 복음」(계14:6)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복음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각 시대와 개인에게 필요한 무수한 권고와 호소를 쏟아냅니다. 이것이 초림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단없이 증거하시는 '예수의 증거'요 '예언의 영'(계19:10)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지금 내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
이것이 "예수의 증거"요 '영원한 복음'이며 현재 일에 관여하는 '현재기별'(present truth) 인데 이 현재기별은 언제나 반대를 당해왔습니다.
노아시대의 전통적 지식(아담하와의 실락원 이야기와 그 교훈 등)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노아가 지금 코앞에서 전하는 그 시대의 '예수의 증거', 홍수기별은 도무지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2천년 전에도 전통적 지식인 구약성경은 상식이요 진리로 받아들여졌으나 그 시대에 오셔서 지금 코앞에서 말씀하시는 '예수의 증거'는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성경66권이 표면적으로는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현재 삶에 관여하시는,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의 증거'는 이해되지 못합니다.
언제나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의 증거" 보다 '사람의 유전', 빗나간 전통주의가 각 시대와 각 교회의 지배논리가 되어왔습니다.
마귀가 두려워 하는 것은 역사속의 교훈이 아니라 '지금 말씀하시는 영'
'현재의 자기상태를 끊임없이 비추임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 하실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성경을 진리로 믿고 열심히 묵상하면서도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의 증거'는 거부할 위험이 있습니다.
현재의 내 삶에 관여해주시는 '예수의 증거'를 환영합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가 아닌
내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지금 살아계신 그리스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