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4:30~32)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도 처음에는 지극히 미미하다.
한마디 말을 들려주고 한줄기 빛을 비춰 주고 새 생애를 시작하도록 감화를 끼친 결과를
누가 능히 측량할 수 있겠는가?” (실물, 78)
제작년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 난 건강이 좋지 않아 잠시 직장을 쉬게 되었다.
건강이 회복되면 복직을 하거나 다른 일을 시작할 계획으로 휴가와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주부와 직장인으로 오랜 세월 바쁘게만 살던 나는 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보는 말씀은 얕은 물에서 해갈하는 것처럼 목마름만 더했다.
내 삶에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내가 어디에 몸담고 있는지,
나의 정체성을 알고 싶은데 나의 탐욕과 맞물린 세상의 경영법칙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소중한 시간들은 신속히 사라지고 있었고 은혜의 날은 몇 날 남지 않았는데
나는 불멸을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무지와 무관심으로 대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쉬는 기간을 기회로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말씀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월 전부터 주위의 집사들로부터 심심찮게 들어왔던 생소한 모임,
무관심한척 했지만 왠지 마음이 끌리고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영적친교모임’에 관심이 갔다.
그곳에 참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싹텄다.
그래서 몇몇 집사들과 뜻을 모아 새롭게 ‘영적친교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이 모임은 내 인생의 행로를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바벨론의 혼잡하고 공허한 삶속에서, 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하늘을 사모하도록 이끄시고
내가 날마다 희미하게나마 부르짖던 그 기도에 주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속에 계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으로 이끄신다.
탁월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교리에 반하여 신앙을 선택하고 이 진리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전적으로 동의하며 살아왔는데 나의 생각에 갇힌 이론 신앙으로는 하늘은 영원히 요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날마다 거룩한 율법의 거울로 나를 비춰보게 하시고 나의 수치를 알게 하신다.
세상 왕국의 메시아를 갈망하던 나에게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소개하신다.
평강의 왕께서는 무서운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와 회복, 치유의 약속을 주신다.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치료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 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새 창조’에 대한 약속이었다.
씨 가운데 있는 배종(胚種)은 하나님께서 그 속에 넣어 주신 생명력의 전개(展開)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왕국도 그와 같다. 그것은 곧 새 창조이다.
그 나라의 확장 원칙은 세상 나라들을 지배하는 원칙과는 정반대이다.
이 세상 나라는 완력으로 정복하고 전쟁으로 저희 주권을 유지하나
새 나라의 건설자는 평강의 왕이시다. (실물, 77)
겨자씨 비유는 이 세상 마지막에 매우 현저하게 또 아주 영화롭게 성취될 것이다.
그 작은 씨가 나무가 될 것이다. 경고와 은혜의 마지막 기별은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계14:6~14) 에게 보급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행 15:14)실 것이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그의 영광으로 환하여”(계 18:1)질 것이다. (실물,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