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속에 거하시는 것」이며 곧 「살아 움직이는 원칙」을 말한다. 이 신앙은 품성속에 나타나 「선한 일을 하도록 해주는」 그리스도의 덕성인 것이다”
(Object Lesson 384)
그리스도께서 생각속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거하시는 것,
박제된 동물표본처럼 액자에 써 박힌 격언이 아니라 성경책 밖으로 걸어 나온 살아 움직이는 원칙,
화 못내는 순둥순둥한 성격이 아니라 선한 일, 험한 일을 기꺼이 도맡는 행동하는 품성
이것이 원래 신앙인 것이다.
생활 속에 거하시지 못하는 예수님...
교회에서 안 보는 것을 가정에선 보고 있다. 교회에서 안하는 말을 가정에선 하고 있다. 교회에서 안하는 일을 가정에선 하고 있다. 교회에서 몸 바쳐 하던 일이 가정에 돌아오면 손 씻듯 중단된다.
생활속에 거하시지 못하는 예수님...
성경책에, 성경연구모임 속에, 교회활동 속에, 설교속에 가두어 놓은 예수님....그리고 생활 속에서는 번번히 문전박대 당하시는 예수님...
그 어긋남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신앙을 피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부분만 잘 카바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순수했던 아이들, 무엇이듯 흡수하는 스폰지 같았던 아이들이 「외식 신앙」을 배운다.
할 말 하는 세대, 무조건적 순종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이라 배워온 이 세대는 안과 밖이 다른 외식신앙에 매섭게 반기를 든다.
젊은이들이 신앙을 등지는 것은 그들 세대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보고자란 어른 세대가 악했기 때문이다.
이 세대는 어느 날 공중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전 세대, 그 전전세대의 성적표요, 청구서이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나눠준 문화, 우리가 읽혀준 책, 쥐어준 장난감, 우리가 보여준 신앙의 모습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공감해 주지 않는 난해한 세대를 만들어 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살아있는 원칙이 되고 계신가?
그 원칙이 교회,가정, 학교,직장에서의 생활을 하나로 관통하는 불변의 기준이 되고 있는가?
그렇게 될 때 이 세대의 아이들도 하라 하지마라 잔소리같았던 복음을 복음으로 알아듣지 않을까?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8)
교회건, 집이건, 학교나 일터이건, 거리이건, 항상, 어디에서나 예수님을 내 앞에, 내 우편에 모셨으므로 흔들림이 없는 상태. 상황에 따라 장소에 따라 변하지 않는 원칙이 심어진 상태
그렇게 되면 우리 아이들, 눈을 뜨기 시작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