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예수님은 자신이 찢기고 매맞는 현장에서 인간적 동정심으로 울던 마음씨 고운 부녀자들이.... 끝내 그분을 거절하여 멸망당하게 될 미래를 내다 보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감동적인 이야기에 눈물 흘리고, 딱하게 된 이웃의 사연에 연민을 쏟아내는 오늘날의「따뜻한 사람들」에게도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떻게 따뜻한 마음, 감동의 휴머니즘 드라마들이 예수를 믿는 신앙과 관계가 없을 수 있는지...
사랑의 근원이신 분과 분리되고도 얼마든지 사랑(?)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인정, 끈끈함, 돈독함, 의리가 힘을 합쳐 구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포위당하는 것을 보셨다. 그는 지금 나사로를 위하여 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도성이 포위될 때에 죽게 될 것이며, 저희의 죽음에는 「희망이 없을 것」을 아셨다.
... 그는 「고통과 슬픔, 눈물과 죽음」이 사람들의 운명임을 보셨다. 각 시대와 각 나라에 사는 「인간 가족들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다.」 죄 많은 인간의 재난은 예수의 심령을 무겁게 짓눌렀고 그가 저들의 모든 「고통을 덜어주시려고 하실 때」에 그의 눈물의 샘은 터졌던 것이다"(소망 534).
장례식에서 인간적 동정심으로 "평화롭게" 울었던 그들이 진짜평화에 대한 지식(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감동스토리에 펑펑우는 사람들이 감정적 카타르시스가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았더라면...
눈물자아내는 사연에 기부금을 보내는 착한 사람들이 그 착한 마음을 주신 분을 인정했더라면...
정의감에 불타는 시민들이 그들의 옳은 행동으로 무고한 의인을 핍박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더라면..